전시라는 멋진 (신)세계, 마치 가능한 것처럼
김성은
긴 시간 미술관의 문을 닫고 건물을 공들여 단장한다. 새 공간에 걸맞게 의미와 재미가 특별한 전시를 역시 공들여 준비한다. 공간은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바뀌며, 공간은 또한 예전과 다른 예술 경험을 창조하는 방향으로도 변화한다. 아마도 그 전시에는 동시대의 첨병이라는 미디어아트가 빠지지 않을 것이며, 이래저래 전시 관람을 돕는 기술적 장치들도 곳곳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관객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오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각종 미디어 플랫폼에서 열띤 활동을 궁리한다. 어쩌면 건물이 다시 문을 열기 전에도 온라인 어딘가의 플랫폼에서 미술관은 여전히 열려 있게 될 것이다.
플랫폼 사회라는 말이 있다. 데이터화한 우리 삶이 자원이 되고 무수히 개인화된 피드백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플랫폼은 모바일이나 스마트라는 수식어를 달고 소셜미디어와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에 힘입어 사회의 정초가 되기에 이르렀다. 알고리즘이 건설하고 통제하는 이 사회는 “기호와 정보, 이미지와 시뮬라크르, 감정과 정동이 무차별적으로 흐르면서 물리적 시/공간을 광폭하게 재구성하고, 새로운 연결들을 생성시키는 ‘소셜’”에 기반하는 “플랫폼 환경에서 인간 행위자는 관심의 항상적 분산과 반응의 즉각성에 사로잡혀 있다.”1)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구조화된 산만성의 압력이다. 정신의 주요 기능들(판단, 사고, 상상, 기억)은 기술적 장치들에 분산된 채 구현되고, 행위자의 감각과 지성은 끊임없이 파도쳐 오는 정동-정보 자극에 노출되어 그 리듬에 종속되거나 적응해야 한다. 사고/숙의/토론하는 주체는 단말기 앞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며 정보를 소비하고 클릭하는 주체로 대체된다.”고 설명한다.
전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물리적인 미술관 방문에 제약이 컸던 팬데믹의 시기를 지나오며 미술관의 거점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역전되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화면을 통해 이미지와 사운드와 텍스트를 보고 듣는 일이 온전한 전시 관람이 아니라고 항변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관객의 신체와 전시된 작품이 한시적이지만 한 공간에 거주하는 감각적인 경험, 화면 속 작품에 대한 데이터에 (단순 클릭으로라도) 감상의 피드백 데이터를 더하는 경험은 선후와 우열이 모호하고 비등한 예술 감상으로 여겨진다. 참여자가 늘어날수록 플랫폼의 효용이 높아지듯, 전시의 가치는 조회 수와 피드 수가 클수록 올라간다고 느껴진다. 매개하는 기술 자체의 경험이 매개되는 예술의 경험과 겹치고 뒤섞여 한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성찰적 지식을 벼리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보다는 빠른 전파, 짧은 주기, 잦은 빈도라는 시간성이 지배하여 전시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진다.
어느 쪽이 더 진정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미술관 전시의 쓸모에 대해 낙담하고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기술이 전시를 대중화하고 민주화한다며 낙관하리라. 기대와 목적이 달라졌을지언정 사람들은 여전히 미술관 전시를 찾아 ‘발걸음’한다. 어떤 전시는 관객이 몰려와 기획자를 환호케 하고, 어떤 전시는 관객이 들지 않아 기획자를 실망시킨다. 어떤 전시는 기획의 정교함과 밀도 높은 의미에 비평적 찬사를 받고, 어떤 전시는 부실하고 대충인 만듦새로 인해 혹평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전시는 횡으로는 관객 경험이, 종으로는 학예 연구가 축조하는 지형이며, 여기에 날로 번성하는 테크놀로지의 층위가 겹겹이 스며들어 지각의 융기와 침강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기술 환경이 도구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형식이라면, 그러한 삶 속에서 전시는 어떠한 존재론적 위상을 가질 수 있을까? 낡은 미술관의 리노베이션을 새 미술관의 건축에 못지않은 혁신으로 바라보려는 열망에서 잠시 벗어나자 말하고 싶다. 그리고 기술의 진보가 일으키고 있는 지각 변동의 출렁거림 속에 ‘제도’로서 전시를 이론적으로 되짚으며 다시 지표를 세워보자 말하고 싶다.
제도란 조직의 행동양식과 상호작용의 정형, 규범, 의식을 일컬으며, 제도의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의 프로세스를 반복하고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제도화이다. 제도화된 기관으로서 미술관은 역사적으로도, 동시대적으로도 “제도 비판” 성격의 작품을 수용하며 그 비판을 다시 제도화할 만큼, 끊임없는 비판의 동력으로 존속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6년 큐레토리얼 연구자인 폴 오닐, 믹 윌슨, 루시 스티드는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의 『제도는 어떻게 사고하는가』(1986)를 이론적 틀로 전유하는 심포지엄을 열고 이를 책으로 엮었다.2) 더글러스의 저술은 제도가 개인의 사회적 인식과 인지 형성에 미치는 영향, 제도가 부여하는 정체성과 제도가 기억하고 망각하는 것, 제도와 지식 생산, 지식 공유의 관계 등을 밝힌 강연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도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동시대 미술과 큐레토리얼 담론의 사이에서』(2017)는 ‘제도를 통해 생각하기’와 ‘제도에 대해 생각하기’라는 두 개의 큰 주제 아래, 동시대 큐레이팅에서 제도와 반-제도의 실천, 관습, 수사를 어떻게 재고할 수 있을지를 여러 전시 사례연구를 통해 설파한다. 여기에서 전면화되는 것은 안드레아 프레이저, 히토 슈타이얼 같은 제도 비판 계열의 작가들이 표현한 대로, 제도의 비판이 도치된 “비판의 제도”로서 미술관이다.3)
포스트-식민, 포스트-이데올로기, 포스트-휴먼 등 ‘이후-’의 세계를 맞이한 지금, 제도에 관한 논의는 다양하게 재점화되고 있다. 서구 중심주의에 가해진 동시대 미술의 변화를 다룬 『예전의 서구: 1989년 이후 미술과 동시대성』이라는 총서에 인류학자 아테나 아타나시오우는 「‘마치 가능한 것처럼’ 제도를 수행하기」라는 글을 실었다.4) 아타나시오우는 미술관 같은 공공의 제도 공간은 공통의 삶과 존재의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데, 이 같은 공적 제도를 잃게 되면 저항하고 재발명하며 개혁하는 과업에 공동의 힘을 동원하기가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가능과 불가능으로만 되풀이되는 이분법적인 고리를 끊고, 정치적이고 수행적으로 ‘제도를 다르게’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제도화의 논리를 거역하면서도 제도의 안에서 제도를 써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비판적 수행성은 두 가지 방향을 수반한다. 첫째, “마치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제도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제도에 저항하는 새로운 체제에 대해 아포리아적 요청을 끊임없이 발신한다. 둘째, 그렇게 해서 “성취했을 때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방향에서 ‘함께하기’와 ‘제도를 달리하기’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사건·사태를 예지하게 한다.
전시를 이 같은 제도로 접근한다면, 1990년대부터 큐레이팅 대신 등장하기 시작한 ‘큐레토리얼’이라는 기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큐레토리얼을 동시대의 역사적 징후로 진단한 큐레이터 권혁규는 이후 나타난 전시의 양상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5) 개념적이고 장소 특정적으로 전시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비-물질 경향, 전시 만들기보다는 강연, 상영, 공연, 독회, 워크숍, 세미나 같은 프로그램들이 부각되는 탈-전시 경향, 그리고 포스트 식민주의의 대두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에 입각한 주제 전시의 경향이다. 권혁규는 미술관의 전시라는 방법론이 서구에서 태동한 만큼 “이를 벗어나는 방법론적 탐구는 곧 주제적 측면에서도 거대 담론의 거부와 변증법적 연구를 필연적으로 동반해야 했다.”고 설명하면서 큐레토리얼의 “매개적 본성”을 강조하였다. 바꿔 말하면, 전시가 비물질적이든 주제적이든, 심지어 전시 아닌 형태들에 자리를 내어주든, 결국 전시는 제도이자 매(개)체이기도 하다.6)
그렇다면 전시는 무엇을 매개하는가? 전 지구적인 난제와 지역적 문제들이 폭발하고 충돌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동시대 미술이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회에 과연 어떤 변화의 각성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전시가 그 어느 때보다 긴급히 타진하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시 자체에 대한 제도 비판의 역사를 현재화하고 활성화하는 일이 중요한데, 미술사·미술관·미술시장이라는 제도를 지탱하는 사회, 경제, 정치적 구조를 제도의 안과 밖에서 비판하던 실천에서 나아가 이제는 일종의 “돌봄의 방식”으로 제도 비판을 다시 구상해 볼 수 있다.7) 생태적으로 기후적으로 위기에 빠진 지구, 기술 권력과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불평등과 양극화, 다양성과 포용성의 관점에서 장애·젠더·퀴어·인종과 같은 의제들을 탐문해야 하는 책무가 전시에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것, 보일 이유가 없던 것을 보게 만드는 일, 소음으로만 머물던 것을 소리로 듣게 만드는 일. 전시는 가능성의 실현보다 가능성의 발생에 집중한다. 세계의 불안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이를 세상의 언어와는 다른 식으로 발언하고자 하는 것이 전시의 정치적인 기질이다. 역사를 환기하고 현재의 경향을 추적하여 미래의 변화 징후를 감지하는 것이 전시의 정치적 기획이다. 전시라는 시공간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그 안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전시에 모인 개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피부로 전해지는 지각, 마음으로 느끼는 정서, 머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벌어지지만 이들 간에 상응하지 못하는 유예 또한 나타난다. 몰아붙이는 제도가 아니라 끌어당기는 제도인 전시의 정치적 수행성은 제도화가 소진하지 못하는 지점,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을 잉태하는 지점에서 언제나 비롯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공상과학 소설 『멋진 신세계』(1932)는 기술이 인간의 감정까지 통제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 사회를 그린다. 말초적인 자극에 사로잡힌 개인들이 자유 의지로 사용한다는 환상 속에서 중독되고 마는 바로 그 기술이 통제의 수단이라는 사실에서, 제목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의 이면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사용되곤 한다. 크고 작은 무수한 스크린 위를 한없이 미끄러지며 살아가는 이 시대에,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시라는 제도는 새로운 세계, 멋진 세계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리라 지레 비관하기보다는 “마치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제도 비판적인 수행을 거듭하고 쇄신한다면 “전시라는 멋진 (신)세계”는 꼭 반어법적으로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도 공간인 부산시립미술관을 되감아 본 전시 ≪과거는 자신이 줄거리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리노베이션 이전을 종결하는 코다가 아니라 이후를 도모하는 프롤로그로 유효하다.
- 1) 김홍중, 「플랫폼의 사회이론: 플랫폼 자본주의와 알고리즘 통치성을 중심으로」, 『사회와 이론』 41집 (2022년 3월): 7-48. (↑)
- 2) Paul O’Neil, Mick Wilson, Lucy Steeds, eds., How Institutions Think: Between Contemporary Art and Curatorial Discourse (Cambridge, MA: MIT Press, 2017). (↑)
- 3) Andrea Fraser, “From the Critique of Institutions to an Institution of Critique,” Artforum 44, no.1 (September 2005): 278-283; Hito Steyerl, “Institution of Critique,” in Institutional Critique: An Anthology of Artists’ Writings, eds. Alexander Alberro and Blake Stimson (Cambridge, MA: MIT Press, 2009), 486-492. (↑)
- 4) Athena Athanasiou, “Performing the Institution ‘As If It Were Possible’,” in Former West: Art and the Contemporary After 1989, eds. Maria Hlavajova and Simon Sheikh (Cambridge, MA: MIT Press, 2016), 679-691. (↑)
- 5) 권혁규, 「1990년대 이후 큐레이팅의 확장에 관한 논의들: 동시대의 역사적 징후로서 큐레토리얼」,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58집 (2023년 2월): 7-28. (↑)
- 6) “Institution as Medium. Curating as Institutional Critique?”이라는 주제로 기획된 OnCurating.org issue #08 (2011), #13 (2012) 참고, https://www.on-curating.org/issue-8.html, https://www.on-curating.org/issue-13.html. (↑)
- 7) Karen Archey, After Institutions (Berlin: Floating Opera House, 2022). (↑)
김성은 김성은은 미술관과 동시대 미술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이자 기획자이다. 미디어아트와 신체적·감각적 경험의 관계, 큐레토리얼과 공동·공유 개념의 결합에 관심이 있다. 2011년부터 2023년까지 리움미술관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