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그 친구들

채찍을 멈추게 할 사람들

김현주
미술관의 입장에서는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이겠지만 나는,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이다. 아닐까? 생각해 볼 틈이 있다. 단순히 오다, 가다의 동사(動詞)로 나뉠 차원이 아닐 때가 있다. 미술관과 사람을 맺는 동사는 더 정밀히 분화되어야 한다. 사례 1. 선택된 사람 오래전 일이다. 다원예술 페스테벌 스프링웨이브(Springwave)에 출품된 나디아 로로(Nadia Lauro)의 〈소리를 듣다 I hear voices〉(토탈미술관, 2007) 감상을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 군데군데 무대 세트처럼 바위 모형이 배치되어 있었다. 일찍부터 도착한 사람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퍼포먼스 시작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공지가 없어서 좀 늦나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불편한 감각. 퍼포먼스는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다.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퍼포머가 있었고 시작 시간부터 미세한 움직임들이 조금씩 고조되고 있던 것이다. 그 동작을 알아채는 데 시간이 걸렸고 감각 하기까지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됐다. 단순히 관객이라고 생각했던 무리들 중 절반이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상투어가 적확하다 할 만큼 퍼포머였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워서 불편한 감각이라고 말하지만 동질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이들 사이에 빗금이 처지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또 다른 경험이 떠오른다. 2012년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를 찾아 맵을 받아 도시 여기저기를 찾았다. 마침 숙소 옆에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이 베리에이션 This Variation〉이 열리고 있어서 그 공간을 방문했다. 안내판을 확인한 후 공간 안으로 진입했는데 깜깜한 어둠에 당혹스러워서 되돌아 나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던 순간 누군가 내 팔뚝을 잡아끌어 나를 더 깊숙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직하게 들은 말은 “It’s ok.” 아니, 잠시만요. 내가 괜찮지 않은데 뭐가 괜찮은 건가요! 이런 항변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어둠 속에 나와 같은 존재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와 같았던 이들이 나와 같은 이들의 진입을 구경하고 있었다.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이 단지 오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미술관을 이루는 사람들이어야만 하는, 존재 전환이 벌어졌던 순간이었다. 퍼포먼스 경험에 입각한 두 개의 사례다. 무언가 다소 분하기도 하고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상황은 아니었다. 사례 2. 선택한 사람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 반호프 미술관에 갔을 때 분할된 전시 공간에 습관처럼 진입했다. 퍼포먼스가 진행 중이었는데 한 명의 가이드가 내게 참여 의사를 물었다. 방관자처럼 지켜보고 싶었지만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참여 중이라서 예의 바르게 참여하기로 했다. 헤드셋을 끼고 오디오 가이드에 따라 지시하는 간단한 동장에 함께 했다.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걸어가서 벽을 마주하고 있다거나 두세 명씩 같은 동작을 취하거나 하는 어렵지 않은 행동들을 수행했다. 짧은 시간 함께 하고서 서로의 느낌을 나누는 비교적 단순한 일이었지만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머뭇머뭇하게 되는 미술관에서의 참여의 문제에 어떻게 어색함 없이 모두 가이드에 따르고 있는 거지? 혹시 참여하는 이들 모두가 알고 보면 나를 제외하고 퍼포머가 아닐까?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어색하게 다가온 이색적인 순간이었다. 대조적으로 또 다른 사례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몹시 부러웠던 경험 중 하나. 함부르크의 아트센터 데이히토할렌(Deichtorhallen)에 들어갔더니 공중에 띄워져 있는 검은 구조물이 있었다. 신을 벗고 올라갈 수 있다는 안내를 받으며 신을 넣을 수 있는 플라스틱 백을 하나 받았다. 아, 귀찮네 싶었고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으니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두 가지 마음이 팽팽했다. 터덜터덜 구조물에 올라갔을 때 목격한 광경은 미술관 경험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 검은 구조물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호리즌 필드 함부르크 Horizon Field Hamburg〉로, 지상 7.5m 높이에 강철 케이블로 매달린 25×50m 크기의 플랫폼이었다. 마치 말레비치(Kasimir Malevitch)의 〈검은 사각형 Black Square〉이 광대한 크기의 수평면으로 확대 설치되어 있는 듯했다. 작품의 규모보다 놀라웠던 건 나처럼 신을 벗고 올라온 이들이 여기저기 평온하게 앉거나 누워 채광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검은 수평 구조물에 반사되는 광경을 여유롭게 즐기면서 이질감 없이 작품과 하나가 되고 있다는 생경함이었다. 미술관에 오고, 간다는 선택과 자유로움이 이토록 하나 되는 장면을 보다니. 미술관과 자유의지가 나란한 정렬을 이룰 수도 있다는 생경함이, 그 생경함이 왜 문제적으로 다가온 것일까? 사례 3. 선택이라 말하기 어려운 상황 그리고 사람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꼭 한번은 경험해 보고 싶은 퍼포먼스가 있다. 아니다. 이젠 그 퍼포먼스가 어떻게 종료되는지 알아버렸으니 상상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상상으로도 충만하다. 그 상상이 미술관을 오고 가는 문제의 차원을 고양시킨다. 충만이라는 어휘가 거슬리지만 일단 이 정도로 얘기하고 넘어간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토마스의 입술 Lips of Thomas〉(1974)은 2005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재상연됐다. 강단 위에 마련된 무대에는 하얀 보를 깐 테이블 위에 와인병과 잔, 꿀이 든 단지, 메트로놈 등이 놓여 있다. 나체로 등장한 아브라모비치는 꿀과 와인을 천천히 비운 뒤 잔을 깨트리고 날카로운 조각을 쥐고서 배에 별 모양을 긋는다. 피가 배어 나오는 몸을 이끌고 얼음 덩어리 십자가 위에 몸을 누이고선 채찍을 들어 자신의 몸을 하염없이 내리친다. 무대와 관객은 일련의 공연장처럼 분리되어 있지만 퍼포먼스는 관객이 아브라모비치의 행동을 더 견디지 못하여 무대에 올라와서 그녀의 손을 잡을 때 종료된다. 바로 이 선택. 이 선택은 어떤 형질의 것일까? 관객에게 이 선택은 비자발적 성질의 것일까, 자유의지의 발로일까? 대체로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고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싶어 한다. 지적이고 미적인 자극을 쾌적한 환경에서 기대한다. 이색 경험은 일상생활에서 채 겪지 못한 공감각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 내게 채찍을 멈추게 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미술관에서 원한 건 필경 이런 난처함이 아니었을 텐데. 아브라모비치의 채찍을 멈추게 한 사람이 나여야 했다면 미술관에서 돌아온 그 밤, 어떤 생각에 잠길까. 선한 의지의 선택과 발로로 한 사람의 퍼포머가 되었음에 의기양양할까.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아브라모비치와 미술관에 대한 불쾌감에 사로잡힐까.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어느새 비판의 올바름 편에 서고 동시에 우위를 점하게 만드는 시대에 내가 이 만능키를 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상상의 충만함 안을 구성하는 문제들은 복잡다단하다. 이처럼 미술관이라는 곳, 미술관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는 낯선 경험을 충족시켜주지 않고 이중 경험을 열어 생활 세계 차원으로 되돌아가서 내 경험의 단서와 출처를 되묻게 만든다. 미술관의 명령어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마부로부터 채찍질을 당한 말을 붙잡고 울었다. 니체는 이후 정신착란으로 여생을 살았다. 채찍은 평이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에 분별을 낳는다. 미술관도 외견상으로는 평이한 삶에서 그렇지 않은 삶을 분간해 내는 제도적 장소처럼 보인다. 물론 미술관으로의 진입은 보통 일련의 선택 정도에 그칠지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충만한 삶 또한 있다. 그러나 아브라모비치처럼 나를 못살게 구는 이들도 종종 있다. 송곳처럼 여기저기를 뚫고 해방감에 훼방을 놓는 아브라모비치들을 확률상 미술관에서 만나기 일쑤이다. 미술관에 오고 가는 차원의 문제 정도에서 어느새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유, 의지, 해방감, 선택 등의 긍정적인 개념 앞에 부(不), 비(非)와 같은 부정적인 수식을 얹어버린다. 다시 감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순조로움을 찍어누르고 기어이 수행에 항력(抗力)을 조장하기도 한다. 나를 그만 좀 편히 살게 해주세요, 불평하고 싶은데 편안함이 그 언제 순조롭게 내 것이었던가? 생활 세계가 편안한 이들이 미술관을 찾을까? 혹은 생활 세계가 편안한 이들은 미술관에서 무엇을 찾을까? 미술관은 편안함이 증폭된 세계라기보다 불편함이 압축된 세계에 가까울 때가 있다. 미술관은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압축 폴더를 마련하고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은 압축 해제를 실행한다. 종종 풀(리)지 않는 폴더도 있고 오작동되기도 하지만, 오다, 가다의 문제는 단순히 움직임에 대한 동사가 아니라 명령어에 가깝다. 실행과 수행의 명령어. (찾아보니 미래 희망이라 여기는 코딩의 세계에도 go 언어가 있다고 한다.) 미술관의 명령어는 오다, 가다라는 단순한 동사에서 촉발되어 수행의 주체를 분주하게 만든다. 채찍을 멈춘 이가 분명 있듯이 채찍을 멈추게 할 사람도 분명 있기를.
김현주(독립큐레이터) 철학, 미술이론, 영상문화학을 공부했다. 예술의 선물과 증여 가치에 대해 고민한다. 정체성을 폐업큐레이터에 두고 있고, 일이 있을 때만 잠깐씩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쓴다. 사회적 쟁점,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에 예술로 개입하고자 하며, 정주보다는 유목적 활동에 관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