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성좌: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한량
학자는 누군가의 손길로 잘 다듬어진 공원을 걷는다. 그를 압도하는 일련의 사물이 도래한다. 투박한 돌, 가공된 철판, 균질한 파이프 등 이질적 사물 간의 이종교배를 마주한다. 그는 관성에 입각해 형식의 기시감을 배제하고, 그 자체로 사물을 분석한다. 나아가 사물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결점 없는 흰 벽이 둘러싼 공간으로 향한다. 가공된 공간에 배치된 사물을 조우하지만, 위화감은 없다. 벽에 단단히 고정된 회화를 응시한다. 캔버스 표면에 안착한 점과 선의 인상을 기술하기 위해 그의 눈과 손이 분주하다. 주인은 철판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학자에게 향한다. 학자는 사물과 회화에 관한 인상을 초월성의 정언명령으로 환원하여 각색한 시나리오를 주인에게 설파한다. 주인은 명료한 의견을 진리로 기입하기 위해 추상적 관념을 학자에게 설파한다. 학자의 시나리오와 주인의 관념은 갈등 없이 서로를 배반하며, 끊임없이 환원의 지층을 쌓는다. 주인의 욕망은, 타자의 기억 속에서 유일한 존재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학자의 욕망은, 주인을 역사의 중심에 배치, 서술하는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두 사람의 분절된 모노드라마에서, 학자는 주인의 사물과 회화에 우월성을 부여하기 위해 배제했던 기시감을 동원한다. 주인은 학자가 열거한 기시감을 소거하기 위해 관념과 형식에 순결성을 부여한다. 학자는 역사 일반의 원리를 따르면서, 감정이입을 통해 주인의 사물과 회화에 개별적 언표를 부여하고, 기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주인을 향한 학자의 감정이입은 공통감각으로 환원되고, 범주화된 연대기가 제시된다. 주인은 사물과 회화를 넘어 특정 연대기의 고유한 주체가 된다. 학자와 주인의 분절하는 짧은 대화는 지배적인 역사화의 원리를 충실히 따른다. 각자의 모노드라마는 반복 재생되며, 역사의 주석을 재생산한다. 돌 하나의 전설, 점 하나의 신화.
순결한 불모지
“보편사의 방법론은 가산(加算)적이다. 그것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1)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역사는 합리적 선택의 총합이다. 대서사로서 ‘역사주의’는 역사를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원리이다.2) 정사(正史)에 입각한 사관을 배반하는 주장은 기각된다. 역사는 사건의 진실을 객관적, 과학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기에 바깥의 가설은 철저히 배제한다. ‘역사’가 모든 과거의 이미지를 붙잡고, ‘사실’을 기록한다는 자증은 자만이며, 지배자의, 승리에 의한, 감정이입을 위한 총체로써 역사가 특정 사건을 중심화하는 관성은 기만이다. 역사라는 기계는 과거의 이미지를 주목하는 학문, 역사의 순결성—사건의 진실을 중심화하는 목적성—으로, 전리품—승자의 개선 행렬을 따르는 문화재—의 암묵적인 위계를 설정하는 방법으로 발전한 미술사3)에 접속한다. 철저히 미술의 ‘역사’에 주목하는 폐쇄성은 과장, 왜곡된 서술을 미술사적 가치로 환원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미술사가 조지 허드 해밀턴(George Heard Hamilton), 미술가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미술사는 미술이 아니다”4), “미술사는 언제나 미술 작품의 가치를 미술가의 논리적인 설명에는 완전히 귀를 닫은 채 판단하고 결정해왔다.”5)라고 언급한다. 뒤샹의 지적처럼, 미술사는 단시간에 생성한 중심의 관념을 통해 신화, 자연, 종교 등을 재현한 회화, 조각 등 당대 미적 경험의 반영으로서 재현물을 미술로 선택하고 공인한다. 미술은 유동적 개념으로 인식되지만, 미적 대상을 재현하는 ‘기예’로 설명한 미술사의 근대적 관념은 미술을 옭아맨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출현한 재현물은 미술사의 가속하는 역사화에 의해 미술로 호명되고, 위대한 성좌로서 인류 보편사에 기입된다.
미술사의 역사화 욕망은 재현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기획6)으로 매 순간 역사적 산물로 가공된 모더니즘 회화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감식에 부합하는 당대의 회화를 형식의 ‘순수성’, ‘평면성’ 등의 명령어로 환원하고, 과거의 재현물이 지닌 연속성을 모더니즘 회화에 연결했다. 즉, 합리적 선택과 명령어의 총체로서 모더니즘 회화를 서양미술사의 계보를 잇는 형태로 기입하며, 최종심급에서 역사가 공인하는 명작의 표본을 제시하는 것이다. 계보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유일한 선택을 받은 명작의 주인은 천재가 된다. 정립된 미술사에서 갱신은 철회되고 명작의 계보, 천재의 신화를 강화하기 위한 첨예한 주석이 작성된다. 당대의 에피소드를 감정이입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여 작성된 불변의 신화를 수혈받은 명작과 천재는 ‘역사적인-’, ‘미술사적 가치’ 등의 수식어와 함께 시공간을 초월하며 도래한다.
세계화 이후 표준을 선취하기 위한 서양미술사의 욕망은 확장된다. 타자의 공간에 서양미술사적 가치로 무장한 명작과 천재의 전시가 순회하는 현상은 일상이 되었다. 서양미술사는 명작에 관한 타자의 자의적 해석을 기각하고, 인류 공통의 감수성에 기인하는 보편적 관점으로 감상할 것을 명령한다. 명령어를 수반하는 타자는 서양미술사를 진보의 산물로 인식하며 지연된 미술사 정립을 위해 역사주의적 서술, 감정이입의 목록화, 명작과 천재의 조건 등의 체계화된 방법론을 답습한다. 중심 궤도에 진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타자는 자신의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의 시간, 이미지를 역사에 기입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 타자의 미술사에서 호명되는 명작과 천재는 중심의 모순에 대립하는 관념을 통해 신화의 고유성을 확보하지만, 분절된 계보를 잇기 위해 서양미술사의 주석을 변용한다. “체계화된 모든 것은 이내 불모지가 된다.”7)
망막의 경제학
“모든 단일 작가의 블록버스터 전시회는 존경의 대상으로 규범적인 단독 작가의 작품을 제공함으로써 천재의 신비를 강화한다. (…) 궁극적으로 블록버스터로 의도된 모든 전시는 관습적인 기대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그 자신의 예술적 목적을 추구하는 영웅적인 아방가르드의 낡고 친숙한 서사에 대한 비판(현재 학계의 조류와 일치하는 비판)을 제공할 능력이 없다.”8) - 에머 바커(Emma Barker)
글로벌 도그마(Dogma)로서 미술사는 미디어에 접속한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미술사가 공인한 명작의 계보, 천재의 신화는 미디어를 매개로 낯설지 않은 이미지로서 대중의 기억에 깃들고, 망막에 잔존한다. 미술사가 전개하는 미디어에 길든 대중은 국가, 문화, 시대, 인종 등을 초월하는 보편적 감수성에 기인하는 균질한 접근법으로 감상할 것을 명령받는다. 대중에게 허락된 감상의 자율성은 미술사의 질서를 진리로 인식하고, 의견을 기입하지 않는 은밀한 조건에서 허용된다. 중심을 열망하는 미술사는 권위를 보존하면서, 엘리트주의 등의 혐의를 부인하는 수단으로 블록버스터9)를 창안한다. 대중을 위한 전시로써 도래하는 블록버스터는 미술사의 규범적 스펙터클 시나리오를 수반하며 ‘역사적인 천재’의 계몽적 서사, ‘위대한 명작’의 탄생 비화 등으로 구성된다.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대중, 박물관 연표를 상기하는 천재의 연대기, 해석의 개입을 차단하는 명작의 캡션, 정시에 해설을 반복하는 도슨트, 캡션을 읊는 오디오 가이드, 명작의 이미지와 확장된 캡션의 도록, 취향을 반영한 상품 등의 풍경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재생산된다. 미술사의 포퓰리즘 징후로서 블록버스터는 대중의 망막에 착란을 일으킨다. 즉, 미술사가 재단한 신화로 구성된 블록버스터의 단편적 풍경은 대중의 시야와 상상력을 제한한다. 블록버스터에 참여한 대중의 스코어는 ‘미술의 대중화’로 명명되고, 보편적 감수성이 반영된 감상법의 확산은 ‘미술의 민주화’를 성취한 것으로 간주한다. 미디어는 산술적 지표로 환산된 블록버스터의 성과를 바탕으로 명작과 천재를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등으로 분류한다. 미술사, 미디어, 블록버스터를 통해 가공된 명작은 경제적 가치를 부여받고, 대중의 취향에 따른 가치판단 아래 소비된다. 블록버스터가 제공하는 단편적 에피소드, 제한적 감상법 등을 조건 없이 신뢰하는 대중은 취향을 발휘하기 위해 미술시장으로 향한다. 미술시장은 미술사가 블록버스터에 부과한 ’역사적인-’, ‘미술사적 가치’와 함께 ’경제적 가치’를 강조한다. 구분이 상쇄된 블록버스터와 미술시장은 ‘미술의 대중화’, ‘민주화’를 기치로 전 지구를 순회한다. 아이린 아나스타스(Ayreen Anastas)와 르네 개브리(Rene Gabri)는 동시대 미술을 구성하는 일련의 용법이 지니는 사전적 정의를 재구성하는데, 시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시장market 명사. (중략) 3. 마치 확실하고 확립된 사실인 것처럼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 것: 어떤 잘못도 없다!”10). 그리고 미술사는 경제학이 된다.
‘미술사-경제학’은 미술관의 토대가 된다. 미술관은 미술사에 제기된 동일한 혐의를 부인하고, 대중의 다변화된 취향을 충족하기 위한 명분으로 블록버스터 수용을 정당화한다. 미술관은 블록버스터를 기점으로 개연성이 부재한 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하면서 대중성, 중립성, 특정성 등을 선취한다. 대중의 취향을 반영한 모더니스트의 명작은 대중성,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혁명가와 보수주의자의 프로파간다는 중립성, 지역・세대・정체성 등의 범주화는 특정성이 된다. 미술사의 명령을 받은 미술관은 천재의 명작을 진열하는 블록버스터를 중심화하고, 암묵적으로 전시의 위계를 설정한다. 기실, 미술관은 대중의 참여가 블록버스터에 과열되고, 그 밖의 전시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할 것을 예견한다. 미술관의 선택은 일거양득(一擧兩得)이다. 블록버스터와 함께 막을 올리는 일련의 전시를 통해 관용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한편, 경영을 위한 불가항력을 명분으로 포퓰리즘을 둘러싼 비판을 불식한다. 다원성, 대중성, 민주성 등을 표상한 미술관의 권위는 강화되고, 성과 지표는 상승 곡선을 그린다. 미술관이 구획한 공간, 분절한 시간의 환영을 조건 없이 수용하는 대중의 피드백, ‘역사적인’ 천재의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명작이 진열된다는 ‘사실’에 경도된 전문가의 발화, 미술관으로부터 제공받은 산술적 지표를 나열하고, 위대한 서사를 부여하는 미디어의 보도는 미술관 경영을 위한 보고서에 반영된다.11) 높은 차원의 제도에 종속된 기관으로서 미술관은 절반의 ‘독립성, ‘자율성’ 등을 영위한다. 즉, 경영을 위한 예산의 당위성과 존립 이유를 증명하는 체계화된 보고서는 미술관을 유지하는 장치이다. 미술관은 과거를 초과하는 성과를 명령하는 제도에 부응하기 위해 블록버스터를 대규모 미술시장이 도래하는 기간에 배치한다. 쇼케이스(Showcase)로서 미술관은 대중의 경유지가 된다. 미술사를 체현하는 미술관이 진열한 프로토타입(Prototype)을 욕망하는 대중은 미술시장에서 유사대리물—포스트 포디즘(Post-Fordism)12)를 반영하는—을 소비한다. 소프트웨어로서 ‘미술사-경제학’, 하드웨어로서 ‘미술관’이라는 쌍두마차는 대중의 결정에 확신을 제공한다. 미술시장은 미술사의 권위를 보존하고, 미술관의 경영을 유지하는 축이 된다. 침묵의 연대는 ‘미술’을 수단으로 헤게모니(Hegemonie)를 재생산한다. 물신(物神)의 신탁(神託)을 받드는 성전은 마더 팩토리(Mother factory)13)가 된다.
불안한 합창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14)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역사는 어떠한 사건을 하나의 진리로 속박하고, 한결같은 믿음을 요구한다. 변형을 제한하고 반론을 금지하는 체계로서 역사는 고유명사가 된다. ‘주체’, ‘중심’, ‘전통’ 등은 역사의 관성을 체계화하는 용법이다. 역사는 사건의 모든 사실을 포섭하지 않는데, 감정이입의 척도가 되는 모델을 선택하는 전통적 방식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입되는 하나의 ‘주체’는 ‘이원론’을 통해 선택된 결과이다. 역사의 관점에서, ‘진보’를 선취하는 지배자는 ‘주체’이자 계몽의 표본이 된다. ‘지배자-주체’의 연대기는 위대한 신화가 되고, 전리품은 찬란한 유산이 된다. 역사의 중심에는 항상 장군이 있다. 장군, 유일한 주체로서 역사의 연속성을 체현하는 권위자. 역사가 사건을 이원론으로 가공할 때 주체는 개별적인 언표를 가지게 된다. 장군은 체계화된 역사의 부동성(不動性)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중심에 머무른다. 중심에 정주하는 것은 중립성을 요구하는데, 가장자리는 위험한 가설로 무장한 무리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장군의 업적을 보전하고, 가설을 상쇄하는 일방통행로이다. 역사가는 절반의 자율성으로, 장군의 완고한 명령어를 강요받는다. 장군은 역사에 기입된 자신의 언표에 빈틈없는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순수한 언어를 창안한다. 장군의 발화를 부연하는 전리품은 관념의 반영물이 된다. 반론하는 자의 입을 막고, 자신의 귀를 닫는 장군은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순수한 언어를 확산한다. 장군은 성전(Holy War, 聖戰)을 명분으로 성전(Temple, 聖殿)을 향해 ‘n명의 개인들’을 배치한다. 장군의 명령어를 수반하는 ‘n’의 혼종성은 기각되고, 순수한 정체성이 부과된다. 장군은 온정주의(Paternalism)를 위시하며 ‘n’을 ‘n+1’로 절충한다. ‘1’은 장군의 개별적인 언표이며, ‘n’은 포로가 된다. 역사는 ‘n’의 사건을 ‘n+1’, 장군의 ‘이름’을 중심으로 통합하고, 환원한다. 전리품은 무력한 성전(Temple, 聖殿) 에 진열되고, 영겁의 시간을 영위한다. 역사의 중심에 정주하기 위한 장군의 히스테리는 지속된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Ⅰ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느낌으로(Feel)》?15)
의식주(Food・Clothing・Shelter, 衣食住)에서 ‘주거지(Shelter, 住)’의 개념은 비-고정적이다. 주거지는 ‘정주’의 대상으로 귀결되는데, 출생 이후에 겪는 ‘영아기 기억상실증’16) 때문이다. 인간이 최초로 머무는 장소는 자궁이다. 인간은 신체가 형성되는 약 38주의 기간 동안 잠재적으로 장소-되기를 실천하고, 이후 다른 존재와 사물을 마주하는 세계로 ‘이주(출생)’한다. 영아기 인간은 보살핌 속에서 분절된 기억을 통해 모든 장소를 고정된 요람으로 인식하고, 이주의 기억을 잃기 때문에 장소의 의미를 정주로 파악한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이주하는 삶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주는 물리적 장소를 점유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으며, 정신적 삶에 있어서 사건의 지도를 그리는 것을 포괄한다. 존재는 자궁에서 ‘장소-되기’를 실천하면서, 출생 이후(최초의 이주) 자신의 신체에 각인된 장소성을 더듬는 과정을 겪는다. 신체는 불연속적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로서 다차원의 정체성이 조우하는 공유지이다. 각각의 신체, 세계와 관계 맺기는 이주를 동반하며 의미망을 생산한다.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는 자신의 신체를 질료로 ‘신체 조각-되기’를 수행한다. 곰리의 신체 조각은 라이프 캐스팅(Life-Casting)17)으로 제작한 석고 형상에 납, 철을 사용하여 형상을 제작하고, 세부 형태를 제거하기 위해 납 판을 부착하는 ‘Adding Skin’ 기법을 비롯해 석고 형상을 단순화하는 과정을 거친다.18) 개인의 신체적 특정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발현된 신체 조각은 ‘주체’ 바깥을 발화한다. 시작도, 끝도 없이 이주하는 신체처럼 곰리의 조각은 ‘장소-되기’를 통해 ‘장소의 장소’가 된다. 느리게 운동하는 존재로서 곰리의 신체 조각은 부동성을 영위하는 ‘조각상’에 머물지 않는다. 이우환 공간으로 소환된 곰리의 조각과 드로잉으로 구성된 ⟨뿌리내리는 자(Rooters), 2017~⟩ 시리즈는 신체의 신경 세포가 합금 되고, 바깥을 뻗어나가는 형상을 드러낸다. 즉, 곰리의 신체에서 이주한 신체 조각으로 ‘우리’의 가시적 형상을 발견했다면, 살(Flesh)과 뼈(Born)를 구성하는 신경 세포가 합성되고 있는 지도를 그려내는 ⟨뿌리내리는 자⟩ 시리즈는 ‘우리’의 비가시적 형상을 표상한다. 기관(Organ) 바깥으로 돌출한 신경 세포를 형상화한 조각, 소실점을 소거하며 선으로 나아가는 드로잉은 우연한 연결접속이 발생하는 신체 내부의 감각 작용의 짧은 순간을 체현한다. ⟨뿌리내리는 자⟩의 뿌리는 ‘구근(球根)’19)으로서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 구근류 식물의 덩어리는 군집에서 하나를 꺾어 꽂아도 갱신하고, 확장한다.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신체처럼 신체 조각은 느린 변화를 생성하며 드로잉은 끊임없는 비가시적 연장선으로 뻗어나가는 시도를 한다.
‘n+1’: 주체의 성전에서 곰리의 신체 조각과 드로잉은 고정된 관념으로 순환된다. 공간의 중심에 위치된 사물과 회화, 주변의 신체 조각과 드로잉은 단절 끝에 불화하지만, 동질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유일한 주체의 기념비적 공간에 뿌리내린 전리품은 곰리의 작품을 대치한다. 주체의 단안적 시선과 단정적 관념은 곰리를 통합하고, 출구를 봉쇄한다. 곰리의 신체는 지층 속에 묻혀버린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Ⅱ 《빌 비올라(Bill Viola), 조우(Encounter)》20)
과거부터 현재까지. 얼굴은 두 개의 축—기표 작용과 주체성—이 뿌리 내린 중심 관념으로서 굴절하는 배치물이다. 권력, 관념, 문화 등과 관계 맺는 얼굴은 역사가 발생하는 장소가 된다. 얼굴은 삶을 영위하면서 남겨진 흔적이 아닌, 이항 대립의 과정으로 생성된다. 역사가 선택한 주체는 얼굴을 배치받는다. 역사의 중심을 순환하는 주체의 얼굴과 대립하는 존재는 배제된다. 인간성의 총체로서 역사는 주체의 얼굴을 통해 관념을 통합하고, 체계화한다. ‘주체의 얼굴’은 ‘역사의 보편적 얼굴’이자 ‘개인의 구체적 얼굴’이 된다. 역사는 이항대립의 선택을 통한 적합한 얼굴을 공인한다. 얼굴을 배치받지 못한 존재는 비인간성을 명령받지만,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더듬는다.21) 역사의 범주에 배제된 존재는 얼굴을 조직하는 중심 관념을 버린다. 선형적 시간 속에서 반복하는 기표 작용, 순환하는 주체성의 관성적 어법과 단절하는 방식으로 인간성의 예속에서 벗어난다. 역사, 주체, 얼굴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는 퇴행하는 인간성을 초월하기 위해 새로운 얼굴을 인식하고 낯선 사건을 천천히 그린다.
빌 비올라(Bill Viola)는 명멸하는 화면과 침잠하는 파열음의 대위법22)으로 사건을 송출한다. 비올라의 무빙 이미지는 결정성, 연속성 등의 긴 기억으로서 역사를 기록, 재현하는 관념에서 탈주하고, 비결정성, 불연속성 등의 짧은 기억으로서 사건의 시간을 생성한다.23) 사건의 시간을 반영하는 무빙 이미지에서 물리적 타임라인은 분화하는데, 선형적 시간을 가공하는 기계—저속, 정지, 중첩, 병치, 역행, 확대 등—가 배치되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체계화되지 않는 존재와 사물의 풍경을 그린다. 소실점을 상쇄하는 풍경, 어떠한 운동—얼굴 경련(표정), 제스처 등 신체의 움직임—을 발현하는 존재의 군상이 반복적으로 송출되는 무빙 이미지는 종결부 없는 가상의 선(신호)으로 시공간을 초월하고, 수신자의 상대적 시간성과 조우한다. 비올라는 최초의 발신자가 주체가 되는 관성을 배반하기 위해 송출 신호를 발신하면서 ‘수신자-되기’, ‘전달자-되기’를 수행하며 군상으로 이주한다. ‘발신자-수신자-전달자…’. 비올라는 무빙 이미지 내부, 외부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정체가 불분명한 군상 속의 존재가 되어 ‘사건-되기’를 실천한다. 무빙 이미지는 주체를 중심화하는 역사가 설파하는 인간성 바깥의 공인되지 않은, 새로운 비인간성을 활성화한다.
‘n+1’: 주체의 고유명은 비올라를 체계화하고, 중심화한다. 분명한 실체로서 주체가 배치받는 구체적, 보편적 얼굴은 비올라의 무빙 이미지와 상충한다. 주체는 순수한 언어로 규정한 자신의 언표를 확산하기 위해 순수한 정체성을 무빙 이미지에 부과한다. 주체의 얼굴과 고유명은 무빙 이미지가 분기하는 신호를 왜곡한다. 무빙 이미지를 둘러싼 발신자, 수신자, 전달자의 상대적 시간성은 박탈되며 주체로 통합된다. 무빙 이미지가 선취한 비인간성은 허물어진다. 화면은 암전되고, 파열음은 소거된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Ⅲ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4.4》24)
‘주체-지배자’의 계보학으로서 역사, 권력을 차지한 지배적인 언어는 등질적이다. 역사와 주체의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사건과 타자처럼 언어는 다수어(Majority Language, 多數語)/소수어(Minority Language, 少數語)으로 구분되고,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학자는 공리를 반영하는 이원론으로 다수어(표준어)를 체계화하는 장면에서 역사가의 얼굴을 가진다. 표준화된 모델로서 다수어는 변형을 금지하는 명령 체계이다. 소수어는 ‘나’만의 언어를 발견, 빼고, 변주를 실천하면서 ‘외국인-되기’를 수행하는 과정이다. 기실, 다수어와 소수어로 구분되는 이항 대립 체계는 무용하다. 구분, 대립 체계를 초월하는 생성적 관점의 소수어는 변형을 제한하는 안정된 형식으로 도래하는 다수어를 연속성과 불확실성으로 변주한다. 사건을 생성하는 존재는 소수어를 통해 역사의 중심에 위치한 주체의 순수한 언어 체계가 지니는 이중성을 파악한다. 존재의 소수어는 다수어, 방언 등의 하위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는 ‘자신’만의 언어가 창안한 생성으로 들어간다. 사건은 변주곡처럼 발생한다.25)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는 죽음에서부터 출발하는 이미지를 상상하고, 가시화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존재로서 볼탕스키는 전쟁의 징후로서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나’, ‘너’, ‘세계’에 관한 질문을 서술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쇼아를 둘러싼 담론은 사건의 정확성, 역사적 사실성, 재현의 윤리성, 희생자의 존엄성 등으로 분화하고, 최종심급에서 ‘사유하기’, ‘상상하기’는 불가능한 행위로 명령, 기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26) 쇼아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는 사건이다. 쇼아를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으로 만드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담론의 체계에 복종하는 것이다.27) 볼탕스키의 이미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쇼아의 역사를 추적하지만, 사실의 재현을 중심으로 역사화를 가속하는 체계와 거리를 둔다. 볼탕스키는 삶과 죽음, 빛과 어둠, 기억과 망각 등처럼 홀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마주하고, 죽음 속에서 삶을, 어둠 속에서 빛을, 망각 속에서 기억을 미분하는 이미지를 생성한다. 프랑스의 유대인 볼탕스키는 사건의 이미지를 소수어로 창조한다. 공포, 부재, 소외, 죽음 등을 반영하는 이미지는 존재를 관통하고, 쇼아를 변주 한다. 볼탕스키는 망각의 굴레에서 기억과 증언을 사유하고, 상상하기 위해서 제노사이드(Genocide)28)를 쇼아에 한정하지 않는다. 시공간을 초월하며 출현하는 일련의 제노사이드를 발화한다. 볼탕스키의 이미지는 사건의 지도를 생성한다.
‘n+1’: 미술사의 명령을 수반하는 미술관은 볼탕스키의 이미지가 생성한 사건의 지도에 시작과 끝이 정해진 역사적 기표로서 마침표를 기입한다. 주체의 순수한 언어 체계와 ‘자신’만의 언어를 미분하는 볼탕스키, 존재를 관통하는 사건과 쇼아를 변주하는 이미지는 오직 명령어, ‘쇼아-‘로 호명되어 고정된다. 주체의 고유명은 볼탕스키의 이미지가 실천한 빼기, 변주의 과정과 통합하고, 의미망은 응고된다. 이미지는 변형과 변주가 제한되는 선형적 시간의 중심에서 표준화된 아카이브가 되어 출현한다. 사건과 지도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Ⅳ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무라카미좀비(MurakamiZombie)》29)
‘역사-파시즘’, ‘장군-파시즘’, ‘자본-파시즘’ 등으로 분화하는 미시 파시즘이 존재한다. 파시즘은 미시적 성분—아버지, 어머니, 백화점, 시장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미시 파시즘은 중심화, 총체화 이전에 출현한다. ‘아버지-파시즘’, ‘어머니-파시즘’, ‘백화점-파시즘’, ‘시장-파시즘’ 등으로 증식되는 파시즘은 미시적 성분을 관리하는 체제를 포괄한다. 파시즘을 파국으로 가공하는 것은 미시적 성분의 안정적 증식을 보장하는 주체의 의지에 비례한다. 주체는 개인과 집단은 권력과 자본을 조건 없는 수동성으로 수용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의 허위의식을 맹신하지 않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개인과 집단의 욕망을 반영하고, 미시 파시즘의 자가 증식을 위해서 상호 작용은 불가결하다. 주체는 거시 체제의 견고성과 미시 체제의 유연성을 교차한 결과를 선전한다. 개인과 집단은 미시 파시즘을 자가 생산과 자가 증식으로 스스로 초점을 흐린다. 미시 파시즘은 대체 불가능한 수단으로 정교하게 구성된 개인과 집단의 욕망에 투입되며, 방향성을 조작한다. 파시즘은 결속에서 선회하여 집단 자살로 향한다. 개인과 집단은 ‘파시즘-관념’을 외치는 산 주검(Living Dead)이 된다.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村上隆)는 완전한 세계를 갈망하는 불완전한 존재의 삶을 인식하고, ‘일그러진 ‘타원’-되기’를 실천한다.30) 다카시는 이상세계 속 인간상을 표준화하는 ‘완전한 원(Circle, 圓)’의 형상이 아닌, 일그러진 타원으로 현실 속 불완전한 인간상을 드러낸다. 주체와 타자, 중심과 주변 등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카시는 불완전성을 체현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일그러진 타원을 생성한다. 어떠한 국면에서 인간은 자신 안의 잠재적 ‘주체성’을 가시화하며, 통합된 아이콘으로 돌출하는 것을 원한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다카시는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에 뒷걸음치지 않는다. 권력과 자본을 중심화하고, 개별적인 언표를 가지는 주체를 열망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다카시의 일그러진 타원은 불완전한 현재, 불분명한 미래의 기표로서 완전한 원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화한다. 전체가 완전한 원을 좇는 기이한 현실 속에서 다카시는 ‘주인’으로 생존하기 위해 미시적 성분을 미시 파시즘으로 가공하는 장면을 재가공한다. 즉, 다카시는 주인으로 생존하는 삶을 열망하는 전체에서 자신을 제외하지 않으며, 등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다카시가 가공한 ‘오타쿠-파시즘’, ‘Mr. DOB31)-파시즘’ 등은 재가공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동일시하는 ‘무라카미좀비’가 되어 출현한다. 자기비판으로서 다카시의 ‘좀비-되기’는 자화상을 넘어, 좀비화되는 현실의 풍경을 사건화한다.
‘n+1’: 주체는 단숨에 그려진 완전한 원으로 다카시의 일그러진 타원을 지워내기 위해 겹치는 과정을 반복한다. 다초점 곡률(Curvature, 曲率)을 내포한 일그러진 타원은 소거되며, 단일한 초점을 지닌 완전한 원으로 대치된다. 완전한 원으로 중첩되어 지워진 다카시의 일그러진 타원은 순수한 기표가 되고, 주체는 재구성된 기표와 상호작용한다. 완전한 주체는 견고한 관념과 유연한 사상으로 미시적 성분의 관리자를 자처하며, 다카시의 자기 비판적 재가공 과정에 파시즘적 방향을 부과한다. 주체의 체계는 다카시의 자발성을 박탈한다.
“너는 이것이다, 너는 저것이다.” 장군은 자신을 포괄하는 성좌를 조직하기 위해 ‘n’의 욕망을 동원하고, 상호작용한다. 장군의 명령어—개인적 언표, 관념, 관리, 기표, 미시 파시즘, 소실점, 순수한 기표, 순수한 언어, 순수한 정체성, 얼굴, 완전성, 위계, 이원론, 정주, 주체, 중심, 지배적 언어, 체계, 체제, 총체화, 통일성, 통합성, 파시즘, 폐쇄성, 표준화, 환원 등—를 선고받은 ‘n’은 죽은 주체가 된다. 바깥을 향하는 ‘n’의 선을 점으로 통합하는 장군은 순수한 질서를 체계화한다. ‘n’의 사건에서 생성되는 추상적인 욕망은 ‘이것’과 ‘저것’의 이원론으로 편집되고, 범주가 구획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역사가는 마침표를 기입한다.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불연속성에서 연속성으로, 불분명성에서 명확성으로. ‘n’과 ‘n’의 사건은 장군이 폐쇄한 출구에서 멈춘다. ‘n+1’. ‘n’은 결코 말할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장군과 ‘n’의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다. 장군은 ‘n’을 포괄하는 우리의 내부에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주체로서 장군과 ‘n’. 분열하는 장군과 ‘n’. 우리는 주체화의 극단으로서 ‘장군-주체’를 단절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욕망의 방향성을 단일한 기표로 종속, 결속하는 매듭을 풀어야한다. 주체에서 ‘n’을, 장군에서 ‘투사’를, 역사에서 ‘사건’을 미분하는 ‘소수자’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역사는 주체와 타자, 역사와 사건, 다수어와 소수어 등을 이항 대립 체계의 끝에서 단일한 관념을 중심화한다. ‘시작과 끝’이 정해지는 총체적 체계를 인식, 인정하면서 주체 속에서 ‘타자-되기’, 역사 속에서 ‘사건-되기’, 다수어 속에서 ‘소수어-되기’. 주체를 타자로, 역사를 사건으로, 다수어를 소수어로. 대중의 욕망과 운동을 조작하는 명령어의 성분을 변주하고, 통과하는 ‘존재-되기’. 천천히 서두르며 사건의 지도를 그리기. “공황은 창조이다.”32) ‘n-1’33)
- 1)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도서출판 길, 2008)』, p. 347. (↑)
- 2) 역사주의는 역사학을 기반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주목받은 방법적 입장이다. 모든 사상(事象)을 역사적 생성 과정으로 파악하고,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가치와 진리가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즉, 최종심급에서 역사의 영역에 절대적 전제를 부여하고, 역사 발전 단계에 있어서 ‘진보’를 추진하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는 의식이다. 19~20세기에 발생한 ‘가치 기준의 상실’이라는 시대적 위기에 무력하고, ‘가치 상대주의’를 생산한다는 주장에 의해 비판받는다. 현대 역사주의는 단일의 가설을 일련의 역사적 사건에 적용하는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역사 연구 일반을 의미한다. 20세기 초반을 역사주의의 종말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역사 연구의 유력한 전제로서 작동하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수정과 절충을 거친 역사주의는 여전히 ‘역사의 진보’를 전제한다. 역사주의를 비판한 대표적인 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등이 있다. 니체는 역사주의를 ‘역사적 병(Historische Krankheit)’으로 호명하며, “오늘날 사람들은 역사를 과대평가하고 있다.”(프리드리히 니체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이러한 맥락에 관한 추정·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I·유고(1864년 가을~1868년 봄) (책세상, 2003)』, p. 562)라고 언급한다. 니체는 역사주의가 모든 사건, 현상을 오로지 역사적 평가에 의존하여 진보의 산물로 환원하는 양태를 비판한다. 나아가 삶에 관한 사유, 성찰이 결여된 상태의 지식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평준화를 경고한다. 벤야민은 세 가지 주장을 통해 역사주의를 비판한다. 첫 번째로,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도서출판 길, 2008)』, p. 337)라고 언급하며, 역사주의가 추동하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맹신을 지적한다. 두 번째로, “역사적 유물론이 파기했던 방식을 이보다 더 잘 특징지을 수 없다. 그것은 감정이입(Einfühlung)의 방식이다. 그것의 원천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진정한 역사적 상을 붙잡을 자신이 없는 마음의 나태함, 태만(Acedia)이다.”(Ibid, p. 335)을 통해 승자를 향한 감정이입의 오류로 분석한다. 세 번째로, “보편적 세계사는 아무런 이론적 장치도 갖고 있지 않다.”(Ibid, p. 347), 보편사(Universalgeschichte) 기술에 있어서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근거 없는 변별성이 역사 내부에서 의미를 얻게 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비판한다. (↑)
- 3) 미술사는 미술의 ‘역사’를 기록하는 근대 학문이다. 객관성, 과학성에 기반한 미술을 둘러싼 역사 기술을 목적으로 미술품이 담보하는 가시성을 활용해 학제 간 연계성을 높이는 전략을 취했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화가, 조각가 등의 연대기, 제작 방법론을 통해 계보를 작성했고,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은 객관성과 과학성을 강조하는 방법론을 바탕으로 회화, 조각 등의 조형적 가치를 형식주의, 역사주의에 입각하여 학제적 기반을 구축했다. 미술사가 독립적인 학문으로 인식된 이후, 양식의 연속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연구한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시대사와 양식사를 동원적인 것으로 바라본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 내용에 주목하는 도상해석학의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역사적 화가, 조각가의 이미지를 보편사에 기입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20세기에 이르러 고전 회화, 조각의 전통에 저항하는 유미주의에 기인하는 아방가르드, 모더니스트가 등장하는데, 그린버그는 형식의 순수성을 기치로 모더니즘을 범주화하고, 당대 미술의 보편사를 작성한다. 바사리에서 그린버그, 나아가 현재까지 미술사는 화가, 조각가의 시대적 산물과 예술가의 작품에 위대한, 유일한 서사를 부여했다. 즉, 천재와 명작은 미술사로부터 발현된다. 아서 단토(Arthur Danto), 키스 막시(Keith Moxey), T.J 클락(T. J. Clark),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한스 벨팅(Hans Belting) 등은 기존 미술사에 대한 비판, 성찰의 담론을 생성했지만, 미술사의 전통은 여전히 유효하다. (↑)
- 4) 토마스 기르스트(Thomas Girst) 『뒤샹 딕셔너리 (디자인 하우스, 2016)』, p. 25(George Heard Hamilton and Richard Hamilton in conversation with Duchamp, ‘Marcel Duchamp Speaks’, BBC Third Programme (October 1959); published as a tape by Furlong (ed.), 1976.). (↑)
- 5) Ibid, p. 25(Quoted from Duchamp’s lecture ‘The Creative Act’(1957), in Sanouillet and Peterson (eds), 1989, pp. 127-37, p. 138.). (↑)
- 6)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 『현대미술비평 30선(중앙일보 계간미술, 1987)』, pp. 66-71, 「Modernist Paintin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ume 4 (Chicago: The Universit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pp. 85-93. (↑)
- 7) 토마스 기르스트(Thomas Girst) 『뒤샹 딕셔너리 (디자인 하우스, 2016)』, p. 25(Calvin Tomkins, Marcel Duchamp. The Afternoon Interviews, New York: Badlands Unlimited, 2013, p. 60.). (↑)
- 8) 에머 바커(Emma Barker) 「규범적 전시, 블록버스터 쇼」, 『전시의 연금술, 미술과 디스플레이(아트북스, 2004)』, pp. 162-163. (↑)
- 9) 시어러 웨스트(Shearer West)는 블록버스터의 구체적인 정의를 명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최대 감상자를 유입하기 위한 최대 프로모션과 최대 보도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로 정의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는 ‘위대한 예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면서 담론을 형성하지만, 본질적으로 상업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기업, 언론, 출판사를 선전한다.”라고 언급한다. (시어러 웨스트 「The Devaluation of 'Cultural Capital’: Post-Modern Democracy and the Art Blockbuster」, 수잔 피어스(Susan Pearce) 『Art in Museums (London : The Athlone Press, 1995)』, p. 75). 앤 히고넷(Anne Higonnet)은 미술관이 직면한 권위 보존, 엘리트주의 혐의 부인, 경영 안정성 유지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블록버스터가 출구가 되며, “감상자 수는 대중성을, 대중성은 ‘문화 민주주의’를, 문화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에 부합한다. 이데올로기 정당성은 후원금이 된다.”라고 서술한다. (앤 히고넷 「Whither the Barnes?」, 『Art in America Vol. 82 (March, 1994)』, p. 64). (↑)
- 10) 원문의 볼드 처리를 따른다. 아이린 아나스타스(Ayreen Anastas), 르네 개브리(Rene Gabri) 「무제」, 알렉산더 덤베이즈(Alexander Dumbadze), 수잰 허드슨(Suzanne Hudson) 『라운드 테이블: 1989년 이후 동시대 미술을 이야기하다 (예경, 2015)』, p. 506. 「Untitled」, 『Contemporary Art: 1989 To The Present (Wiley-Blackwell, 2013)』, p. 401. (↑)
- 11)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 논리’의 두 장면을 언급하는데, 대체 불가능한 지식 생산의 가치를 지닌 미술 작품이 통화로 유통되는 현실과 미니멀리즘이 다시 주목받는 1990년대 이후 미술관이 본격적으로 대중화와 산업화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미술관은 디즈니랜드처럼 산업화된 레저 활동의 장이 되며, 미적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는 미술 시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The Cultural Logic of the Late Capitalist Museum」, 『October 54(Autumn, 1990)』, pp. 3-17). 다니엘 뷔렌(Daniel Buren)은 미학(Aesthetic), 경제(Economic), 신비적(Mystical) 기능을 수행하는/작품의 생산과 명시화가 동시에 발생하는/선택된 작품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전시된 사물을 “예술”로 승격시키고, 전시되는 “예술”을 둘러싼 질문을 회피하는/신비적인 “예술”을 제시하는 공간으로서 미술관을 설명한다. (다니엘 뷔렌 「Function of The Museum」, 『Art Forum vol. 12 (September, 1973)』, p. 68, https://www.artforum.com/print/197307/function-of-the-museum-1-36272). 크라우스와 뷔렌의 논의를 종합하면, 미술관은 일반적인 기업과 오버랩된다. 예를 들면, 애플(Apple)의 개발자 컨퍼런스 ‘WWDC(Apple Worldwide Developers Conference, 애플 월드 와이드 디벨로퍼스 컨퍼런스)를 통해 새로운 소프트웨어, 기술, 제품 등을 공개하고, 체험과 피드백 세션을 구성한다. WWDC처럼 미술관은 체계화된 연간 전시 계획을 공개하고, 신제품으로서 블록버스터, 커미션, 프로그램 등을 발표한다. 전시를 둘러싼 대중과 미디어의 피드백은 경영의 방향성이 된다. 애플과 미술관의 변별점은 경제적 가치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에 있다. 전자는 가시성의 전략을, 후자는 비가시성의 전략을 채택한다. 그러나 전략의 본질은 동질적이며, 미술관의 기업화는 가속된다. (↑)
- 12) 벨트를 통한 자동화를 결합한 대량생산 방식을 자동차 생산 공정에 도입한 포드자동차의 창립자 헨리 포드(Henry Ford)의 이름에 착안했다. ‘소품종대량생산’을 모토로 창안한 ‘3S(제품 및 작업의 단순화(Simplification), 부품의 표준화(Standardization), 기계 공구의 전문화(Specialization))’ 원칙은 대량생산을 촉진했고, 대량소비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포스트 포디즘은 포디즘의 위기 속에서 대안으로 제시되며, ‘다품종소량생산’을 모토로 전문성을 갖춘 그룹의 분업화, 노동자의 의사 결정 강화 등 유연한 생산 방식을 통해 시장을 세분화한다. 포디즘의 대량소비의 확산에 반하는 포스트 포디즘은 소비자의 취향 데이터를 수집하고, 트렌드 변화에 따른 수요를 예측한다. 취향의 변수가 수용된 제품은 소비자의 선택지를 넓힌다. (↑)
- 13) 기업이 보유한 전 세계 생산 라인의 모체(母體)로서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공장을 뜻한다. 국내외 공장의 생산성, 효율성을 컨트롤하고, 핵심 기술 연구・개발(R&D), 공정 혁신, 샘플 생산, 양산성 검증, 품질 보증 등에 주력한다. 기업의 소재지에 첨단 기능, 최첨단 설비를 구축한 공장을 마더 팩토리로 상정한다. 해외의 하부 거점 공장은 양산에 집중하고, 현지 시장을 공략한다. (↑)
- 14) 원문의 볼드 처리를 따른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 서론: 리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 39. (↑)
- 15) 2019. 10. 18 - 2020. 04. 19, 이우환 공간(부산시립미술관). 영국의 작가, 안토니 곰리는 1980년대 초부터 자신의 신체로 조각을 제작하는 라이프 캐스팅(Life-Casting) 기법을 통해 관계, 존재, 장소 등의 사유를 작품으로 실천한다. 이우환 공간에서 곰리는 ⟨뿌리내리는 자(Rooters), 2017~⟩ 시리즈(조각, 드로잉)를 전시했다. 기존의 라이프 캐스팅으로 제작된 신체 조각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으로서 절제된 형상을 드러냈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Ⅰ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느낌으로(Feel) (부산시립미술관, 2019)』(art.busan.go.kr/tblTsite07Display/viewPastClient.nm?id=20191007102027311). (↑)
- 16) 만 2-3세 전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영아기 기억상실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1) 영아기에는 기억과 관련된 해마, 전두엽의 발달이 미성숙하므로 환경으로부터 입력되는 지식, 경험의 과부하를 겪는 상태에서 기억을 잃는다(Kathryn Boyer, Adele Diamond 「Development of memory for temporal order in infants and young children(1992)」, 『Child Development vol. 8 (Pearson: Allyn & Bacon)』, p. 298). 2) 언어 발달을 통해 지식, 경험이 지각적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언어를 기억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수준의 기억을 저장하지 못한다(Keryn Harley, Elaine Reese 「Origins of autobiographical memory(1999)」, 『Child Development vol. 8 (Pearson: Allyn & Bacon)』, p. 299). (↑)
- 17) 라이프 캐스팅(Life-Casting)은 대상의 신체에 석고를 바르고, 굳히는 과정을 거쳐 형상을 복제하는 전통적 기법이다. 대상의 형상을 섬세하게 복제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 지문, 모공 등의 디테일을 재현할 수 있다. (↑)
- 18) 초반의 신체 조각은 납을 사용하여 속이 빈 조각에 납 판을 부착하는 방식으로 특정 주체의 형상을 제거했다면, 1990년대부터 단순화한 석고 형상에 철을 사용하여 내부를 충전하여 제작한다. 외부 작용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부식되는 철의 성질을 활용하여 존재와 조각의 관계를 동원적인 것으로 은유한다. 안토니 곰리 ⟨Vent(Lead, Plaster, Fibreglass, 178×48×50cm, 1983-1988)⟩, (www.antonygormley.com/works/sculpture/series/early-single-lead-bodycase-works)/⟨Total Strangers(Cast Iron, 195×54×32cm, 6 Edition, 1996)⟩, (www.antonygormley.com/works/exhibitions/total-strangers) 참조. (↑)
- 19) 알뿌리(Bulb). 구상(球狀), 괴상(塊狀)으로 된 줄기, 뿌리의 총칭이다. 잎, 줄기, 뿌리 등이 양분을 저장하기 위하여 덩어리 구조로 뿌리부의 조직처럼 보이는 형태로 발달한 뿌리의 한 기관이다. 비늘줄기(백합, 튤립 등), 알줄기(프리지아, 사프란 등), 덩이줄기(감자, 아네모네 등), 뿌리줄기(붓꽃, 아이리스 등), 덩이뿌리(고구마, 작약 등)로 구분한다. (↑)
- 20) 2020. 10. 21 - 2021. 04. 04, 부산시립미술관・이우환 공간. 미국의 작가, 빌 비올라는 1970년대 초부터 무빙 이미지를 매개하여 존재의 삶을 관통하는 탄생, 죽음, 감각, 무의식 등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사유하고, 어떠한 사건을 생성하기 위해 학제 간 경계를 초월하는 방법론을 시도한다. 이우환 공간에서 1970년대 초반, 부산시립미술관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Ⅱ 빌 비올라(Bill Viola), 조우(Encounter) (부산시립미술관, 2020)』(art.busan.go.kr/tblTsite07Display/viewPastClient.nm?id=202009281450331996). (↑)
- 21) 얼굴을 배치받지 못한 존재에게 얼굴이 부재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얼굴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주체를 선택하고, 얼굴을 배치하는 것은 가시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중심의 궤도에서 벗어난 존재의 얼굴은 비가시성의 차원에서 똑바로 더듬는 과정을 통해 인간성으로 조직된 얼굴을 버린다. 퇴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성을 중심화하는 주체의 끝이 정해진 점, 인간성을 초월하기 위해 비인간성을 활성화하는 존재의 분기하는 선. 가시성과 비가시성에 기인하는 강도의 차이다. (↑)
- 22) 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선율을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 기법이다. ‘음표 대 음표’를 뜻하는 라틴어 ‘Punctus Contra Punctum’에서 유래한다. 음악은 단선율(Monophony, 單旋律: 부가 성부, 반주 없이 단일의 선율로 구성된 것)을 제외하면, 수직적 결합(화음・화성)과 수평적 결합(Melody)으로 구성된다. 다성음악(Polyphony)의 기법으로서 대위법은 동성음악(Homophony)의 기법이 되는 화성법에 대비된다. 대위법은 모방의 기초가 되는데, 하나의 선율이 다른 선율의 모티브가 되어 분화한다. (↑)
- 23)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신경학자와 정신 생리학자가 긴 기억(가족, 인종, 사회, 문명)과 짧은 기억(1분 정도의)을 구분한다고 언급한다. 긴 기억은 나무 유형이며 중심화되어 있는 반면에 짧은 기억은 리좀 유형이다. 짧은 기억은 거리를 두고 작용할 수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도래하기 위해 불연속, 단절, 다양체를 전제한다. 우리는 긴 개념으로 이루어진 긴 기억으로 읽고 다시 읽어도 글을 쓸 때는 짧은 기억, 짧은 관념들을 쓴다. 짧은 기억은 순간이 아닌 집단적, 시간적, 신경적 리좀과 뒤섞인다. 긴 기억은 자기 내부에서, 거리를 두고, 뜻하지 않게 비동시적으로, 비시대적으로 복사하고 번역한다. 「1. 서론: 리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p. 36-37. 리좀에 대해서는 Ibid, pp. 16-35, 54-55. (↑)
- 24) 2021. 10. 15 - 2022. 3. 27, 부산시립미술관・이우환 공간. 프랑스의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홀로코스트(Holocaust)=쇼아(Shoah, 히브리어로 ‘절멸’, ‘학살’의 뜻을 지니며 홀로코스트를 지칭))을 둘러싼 희생자와 남겨진 자의 기억, 삶과 죽음에 관한 근원적 질문 등을 작품으로 서술한다. 볼탕스키는 과거의 참사, 비극적 사건 등을 단숨에 역사화하는 것이 아닌, 유한한 존재의 기억과 망각의 관점을 통해 생성된 사건을 바탕으로 작품을 수행한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Ⅲ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4.4 (부산시립미술관, 2021)』(art.busan.go.kr/tblTsite07Display/viewPastClient.nm?id=202110081052078194). (↑)
- 25)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p. 195-213 참조. (↑)
- 26)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쇼아를 사유하고, 상상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담론의 체계에서 이미지를 읽는 일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쇼아를 과거, 망각, 죽음, 어둠 등으로 외면하거나 불가침의 영역으로 결부하는 상황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는 위베르만의 동명의 저작에서 차용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원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Images malgré tout) (Minuit, 2003)』, 영문 『Images in Spite of Al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8)』, 국문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레베카, 2017)』. (↑)
- 27) 사회적 법칙으로서 권력이 집중된 지배적 언어에 복종하는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문법에 충실한 올바른 문장은 통일성을 부여하고, 통합성으로 귀속하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쇼아를 중심화한다. 비문법적 문장은 쇼아를 둘러싼 기억과 증언을 사유, 상상하며 사건을 변주하는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
- 28) 제노사이드는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이 국제법에서 집단 학살을 범죄 행위로 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사용되었다. 민족, 종족, 인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의 ‘Cide’를 합성한 것이다. 종교, 인종, 민족, 이념 등으로 대립으로 발생하는 ‘집단 학살’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나치가 자행한 쇼아(1941 - 1945), 캄보디아의 킬링필드(1975 - 1979), 코소보 사태(1998), 동티모르 사태(1999) 등이 있다. (↑)
- 29) 2023. 01. 26 - 04. 16, 부산시립미술관・이우환 공간.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는 서브 컬처 ‘오타쿠’에 기인하는 만화, 애니메이션의 평면성을 미술과 결합한다. 다카시의 작품을 개괄하는 ‘수퍼플랫(Superflat)’은 표면을 강조하고, 평면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계급과 대중적 취향의 차이를 상쇄하는 문화를 창안한다고 주장한다. 다카시는 수퍼플랫의 ‘평탄화’ 전략을 3부작의 전시를 통해 개진한다. 《Superflat(2001. 01. 14 - 03. 27, MOCA,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를 시작으로, 《Coloriage(2002. 06. 27 - 10. 27,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Paris》, 《Little Boy: The Arts of Japan’s Exploding Subculture(2005. 03. 08 - 07. 24, Japan Society, New York) 》. 부산시립미술관의 《무라카미좀비》 전시는 초기작부터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변화하는 양상을 주목했다. 다카시는 자신을 ‘무라카미좀비’로 상정하고, 전체적으로 좀비화되는 우리의 풍경을 가시화한다.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일본 사회를 넘어 세계 사회의 불안을 응시한다. (https://buly.kr/DlFp74J) (↑)
- 30) 사와라기 노이(Sawaragi Noi, 椹木野衣)는 일본의 근대를 관통한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반영한 전쟁, 패전 이후 임시변통적 수습 과정에서 발생한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평화를 이행하는 모순에서 일본 현대 미술의 기원을 추적한다. 폭력적 진보로 구성되는 모순된 평화는 일본의 현실을 구성한다. 일본의 ’폭력-평화’는 일본 현대 미술과 공범관계를 맺고, ‘닫힌 원환’으로 호명된다. 노이의 ‘일그러진 타원’은 ‘완전한 원’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 다양한 언어, 민족, 문화, 취미 등과 착종, 분열되는 다초점을 지니는 일그러지고 ‘애매’하게 그려지는 타원을 의미한다. “일본의 ‘미술’은 그 자명함에서도 아름답게 닫혀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원환은 실제로 볼품없이 일그러져 있다. 이 일그러짐에서 만들고, 쓰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우리의 다양한 삶도 또한 새로이 발견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원이라는 완전한 ‘미’는 실제로 그것이 타원이라는 현실을 망각함으로써 생겨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사와라기 노이 「제4장 스키조프레닉한 일본의 나 Ⅱ」, 『일본・현대・미술 (두성북스, 2012)』, p. 119, “일그러진 타원”, pp. 116-122. (↑)
- 31) Mr.DOB(미스터 도브)는 1993년에 제작된 다카시의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다카시의 분신으로서 Mr. DOB는 미국 개념주의에 기인하는 텍스트 작품이 조건 없이 수용되었던 일본 미술계에 대한 비판의 제스처였다. 다카시는 1970년대 만화 ‘시골뜨기 대장(いなかっぺ大将)’의 명대사 “Dobojite? Dobojite?(왜? 왜?, どぼじで? どぼじで?))”, 코미디언 유리 토루(由利徹)의 유행어 “Oshamanbe(오샤만베, 홋카이도의 지명, 성적 의미를 내포한 은어)”를 합쳐 “Dobozite Dobozite Oshamanbe”라는 언어유희가 반영된 무의미한 문구를 제작한다. Mr.DOB는 “Dobozite Dobozite Oshamanbe”의 첫 글자들이 형상화된 다카시의 자화상이다. 다카시는 자신의 현실과 감정을 반영하는 Mr.DOB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면면을 드러낸다. (↑)
- 32)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3. 기원전 1만년-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 143. (↑)
- 33) 들뢰즈와 가타리는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라고 질문한다. 유한한 수의 상태들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 전쟁 리좀,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 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중앙의 명령(=질서)의 사본이나 복사물은 없다. 기계적 배치물이나 기계 사회인 다양체는 중심화하고 통일화하는 모든 자동장치를 “반사회적 침입자”로 거부한다. n은 언제나 n-1이다. 「1. 서론: 리좀 」, Ibid, p. 39-41. (↑)
김한량(x-worker)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의 분할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에서 부터 시작되는 본질적 질문을 도처에 배치하고 있다. 일련의 사건은 '나'의 신체에 기입되고, 지도를 더듬으며 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된다. ‘출구-입구-출구-입구……’. 개인의 삶과 감각, 세계상(World Picture)으로서 이미지, 퀴어로서 자긍심과 수치심, 정치적 인간, 유목민의 도주선 등 사건은 ‘나’에게 도래하고 이끈다. 세계상을 질서와 비-질서의 인덱스로 연결접속하며 연구・실험 속에서 발생하는 작품, 전시, 비평은 나의 믿음이 반영된다. '타인을 위한다는 것’, 그것은 위선이자 거짓말이다. 믿음의 관철이 아닌 믿음의 지도를 그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