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OO하기: ‘참여 프로그램’의 양가적 태도
김선옥
미술관에 공존하는 사람들
미술관에 갈 때마다 전시를 볼 뿐만 아니라, 특히 어떤 유형의 관람객이 미술관에 방문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된다. 전시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항상 제각각이다. 평일 오후에 여유롭게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들, 주말을 이용해 문화예술을 즐기려는 인파 속 사람들, 입소문에 오른 전시를 인증사진으로 빠르게 남기고 공유하는 사람들, 의무감에 전시를 후다닥 보고 금세 사라지는 미술 관계자들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미술관을 드나드는 풍경은 정작 전시 자체보다 흥미로울 때가 종종 있다. 이들은 비단 ‘전시 관람’만을 위해 미술관에 발을 들이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 위주의 미술관 운영 철학 전환과 매체의 다원화로 인한 전시 어법의 변화, 그리고 ‘참여예술’의 확장으로 관람객의 역할은 더 이상 전통적인 개념에 머무르지 않는다. 미술관과 관람객의 관계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고, 이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에 기반한 일종의 ‘라포(Rapport)’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에 관한 접근방식이 입체적으로 변화했고, 관람객은 자신의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수동적인 관찰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관람객은 작품의 의미를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술관은 마치 관람객 중심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거듭난 듯 보이는데, 미술관이 어떤 방향으로 현재 움직이고 있는지 더욱 비평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미술관이 구축해 놓은 서사에 관람객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고 미술관은 ‘민주적’ 공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규범을 보존하려는 전시장을 벗어난 미술관 내 다른 공간, 예컨대 세미나실, 강당, 블랙박스, 로비 등은 관람객과 새로운 소통의 장을 위한 ‘아고라’가 될 수 있을까? 기존의 견고한 권력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관람객의 ‘참여’에서 찾게 된다면, 낡은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이상적인 미술관이 될 수 있을까?
다층적인 변화 속에서 미술관은 다양한 소통 방식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관람객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포스트-뮤지엄(Post-Museum)’ 개념의 등장 이후, 많은 미술관이 전통적인 전시장의 역할을 벗어나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면서 미술관은 공연장, 극장, 상점, 서점, 카페, 도서관, 학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미술관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열린’ 미술관의 방향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미술관은 일방적인 지식 전달에서 벗어나 관람객과 상호작용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주로 전시 연계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 가령, 작가와의 대화, 라운드테이블, 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엄 등이 있고, 작품의 일환으로서 참여 퍼포먼스를 진행하거나, 심지어 서울시립미술관의 <예술가의 런치박스>처럼 작품 관련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식사를 같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프로그램은 ‘참여’를 상정하고 있다. 관람객이 미술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미술관에 가는 행위는 단순히 ‘방문’을 넘어 ‘경험’을 위한 것이다. 반면, 미술관의 입장에서 참여 프로그램은 관람객과 소통 범위를 확장하는 것과 더불어, 동시에 더욱 많은 사람을 미술관에 동원할 수 있다는 이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작년 《나는 미술관에 OO하러 간다》(2022.04.22~10.16)를 개최하여 전시 외에도 드로잉, 참여 퍼포먼스, 수제 맥주 제조, 커피 실습, 전문가 강연, 요가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전시 제목이 지시하듯, 미술관은 여러 ‘활동’이 위임된 장소로서 관람객의 주체적 수행성을 강조한 듯 보이는데, 기획 의도에서는 “여가 활동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미술관이 제안할 수 있는 대안적 알고리즘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밝히고 있다. 미술관 입장에 공식적인 장벽은 없겠지만, 미술관을 방문하는 데 존재하는 사회적 격차를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교육, 연령, 주거지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에 따라 미술관 방문은 여전히 접근 장벽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대한 제한된 접근을 느슨하게 풀었다는 점에서, 부산시립미술관의 시도는 신선했지만, 자칫 미술관 방문의 동기 부여를 한시적인 이벤트로 공고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는 논쟁적이다. 미술관은 시민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공공적인 공간으로 존재하지만, 미술관에서 참여할 수 있는 활동에서 어떤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특정해서 체험하게 되는 여가 활동은 대중적인가, 공공적인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현대미술관 관장 즈덴카 바도비나츠(Zdenka Badovinac)는 다양한 취향과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미술관을 ‘주류(mainstream) 미술관’, 한편 ‘비평적(critical) 미술관’을 ‘민주적’인 미술관이라 칭했다. “주류 미술관과 비평적 미술관 양측 모두, 미술관을 더욱 민주화하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측의 노력에는 차이가 있다. 비평적 미술관은 신자유주의의 전면적 상품화 및 다양한 사회적 영역의 균질화에 대항하고자 한다. 한편 주류 미술관은 미술관 산업에 가능한 한 많은 소비자를 유치하기 위해 민주화를 천명한다.”1) 부산시립미술관은 과연 위 둘 중 어디에 방점을 두고 운영하고 있는가? 미술관은 누구를 위한 곳인가?
참여 프로그램의 운동성, 그리고 휘발성
미술관이 시도하는 참여 프로그램이 반드시 ‘공공성’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누구나 동등하게 미술관에 입장 가능한 조건과 미술관을 친숙하게 만드는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른 쟁점이기 때문이다. 미술에서 ‘참여’의 행위가 지닌 이중적 함의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정치성’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추상적인 ‘수행성’을 근거로 미술관에서 대중이 쉽게 느낄만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들어 미술관에서 특히 눈에 띄게 늘어난 사례는 요가, 명상 같은 ‘체험’ 프로그램이다. 뉴욕 현대 미술관과 브루클린 미술관 등에서도 이미 몇 년 전부터 관람객과 소통하기 위해 요가 프로그램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전시장 내 작품 앞에서 관람객들이 형형색색의 요가복을 착용하고 각자 자신의 매트 위에 누워 동일한 동작을 다 같이 행하는 모습은 진풍경이다. 일시적이지만 집단으로 형성되는 유대감은 미술이 특정 계층에게만 귀속되어 있다는 편견을 날려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 얼마나 대중 친화적인가!
‘참여’는 근본적으로 ‘운동성’을 속성으로 가지고 있고, 특히 ‘동원성’의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단지 전시 관람만으로 장시간 관람객을 전시장에 머물게 할 수 없는 미술관은 차라리 전시의 시간을 유예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은 현재 시점에 완료되지 않고, 전시 연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다만, 참여 프로그램이 순수한 목적으로 관람객에게 전시의 경험을 지속시키기 위한 것인지, 다른 의도 때문인지 무엇으로 가름할 수 있을까? 전시 연계 프로그램이 설득력을 잃는 경우는, 말 그대로 전시의 주제와 프로그램 사이가 긴밀하게 연계되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요가’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독일 ZKM에서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의 개인전 《Nowhere and Everywhere at the Same Time, No.2》(2023.7.1.-8.6.) 연계로 요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안무의 개념을 관람객이 스스로 자기 몸을 움직이고 감각하면서 작품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재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이 요가 프로그램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서 당위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한편, 최근 많은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요가 프로그램은,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 요가를 체험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의미로 작동할 수 있을까? 미술관이 단지 시민의 체험을 위한 장소로 기능하는 것이 과연 공공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전시는 왜 공적 매체일까? 여러 비미술 프로그램을 나열하고 병치하는 것이 고정관념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핼 포스터(Hal Foster)는 지난 20년간 현대 및 동시대 미술관의 확장으로 “초대형 프로그램” 즉, “오락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여전히 존재하는 스펙터클은 미술관의 ‘오락 경험’을 우대했다고 봤다. 여기서 “현대 미술관의 딜레마”를 “경험 아니면 해석”으로, 한편에는 “오락”이, 다른 편에는 “미적 관조/역사적 이해”가 있다고 구분한 1996년 테이트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니콜라스 세로타(Nicholas Serota)의 이야기는 오늘날 다르게 수용된다. 미술관은 참석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만, 미술관 건축이 스펙터클의 몰입 환경을 반복하기보다, 다른 종류의 주체성과 사회성을 지지하는 공간들을 허용할 수도 있으며, 곧 “경험과 해석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곳”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
미술관 스스로 자신을 조직적으로 상품화시키는 전략은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미술관에서 소비할 수 있는 경험이 모두를 위한 미술관이라는 환상은 여전히 대중을 자극하고 있지만, 미술관에서 가능한 경험이 단순히 ‘스펙터클’에 그치지 않고, 관람객 스스로 해석의 행위가 가능하고, 의미를 생산할 수 있어야 미술관은 미술관으로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가 일회성 이벤트로 진행되는 참여 프로그램의 특성상, 지속해서 비평이 생산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술관에서 관람객 중심의 경험을 실천하고 있는 방식에 관해 더욱 첨예한 이야기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2022년 개정된 ICOM의 박물관·미술관 정의와 더불어, 미술관은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며, 다양성을 추구하고, 소통을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가 되었다. 미술관은 지난 시간을 끊임없이 재현하며 현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펼쳐 보이고, 이를 통해 근미래를 유추하고 상상할 기회를 마련한다. 사회 구성원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미술관 프로그램은 개인이 가진 여러 맥락에 따라 미술관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만, 미술관 방문객을 단순히 수적으로 늘리는 것 말고, 관람객의 스펙트럼을 더욱 확장하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이 무엇보다 절실해 보인다. ‘다양성’은 이때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관 전시는 이미 정치적 공간으로서 발언권을 획득한 지 오래되었는데, 연계 프로그램은 여전히 중립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관람객이 미술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행위는 사회적인 과정이다. 미술관이 공공 공간으로서 관람객 참여의 당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이 방식이 관람객 자신의 이야기를 구축할 기회여야 할 것이다. 미술관에 입장한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미술관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해석할 수 있는 때, 미술관은 비로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미술관에 OO하러 간다》의 수많은 ‘나’는 미술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미술관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번 전시와 연계 프로그램이 그 가능성을 살펴본 시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간의 휘발성에 근거한 전시는 관람객의 참여를 통해 미술관에서 다른 외양으로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이 어떤 모양을 제시하는지에 따라 그 실천의 가능성 또한 달라질 것이다.
- 1) 즈덴카 바도비나츠, 「민주적 미술관」, 박은아 역,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 국립현대미술관, 2020, P. 22. (↑)
- 2) 핼 포스터, 『소극 다음은 무엇? 결과의 시대, 미술과 비평』, 조주연 역, 2020, 워크룸 프레스, p. 118. 참고. (↑)
김선옥(기획자) 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