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미술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질문
안소현
“왜 훌륭한 지역 미술관은 없었는가?”는 이른바 미술관 문제에 관한 논의의 배후에서 책망조의 질문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미술관 ‘쟁점’과 관련해 대두되는 다른 많은 질문처럼, 그것은 또한 문제의 본질을 왜곡해 “지역 미술관은 훌륭해질 능력이 없기 때문에 훌륭한 지역 미술관이 없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교묘하게 답을 유도하기도 한다.
지역 미술관이 취하는 첫 번째 반응은 주어진 미끼, 갈고리, 낚싯줄, 봉돌을 모두 삼키고 그 상태에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역사적으로 가치 있거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지역 작가의 예를 발굴해 보여준다. 작품이 흥미롭거나 다작한 경력을 가졌다면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적절한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무명의 꽃 그림 화가라든가 모작만 제작하던 화가일지라도 ‘다시-발견’해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하지만 그런 학문적 연구는 “왜 훌륭한 지역 미술관은 없었는가?”라고 묻고 그 질문의 배후에 놓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뭔가 답하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오히려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를 암묵적으로 강화하고 만다.
오늘날 일부 지역 미술관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지역 미술에는 국제적 미술과는 다른 종류의 ‘훌륭함’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독특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지역 미술의 스타일이 있다고 가정한다. 지역의 스타일은 작품의 형식이나 표현적인 특질에서도 확연히 다르고, 지역 고유의 상황과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둔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역성’이라는 공통적인 자질로 지역 미술가들의 스타일을 모두 연결하지는 못한다. [...] 특정 영역의 주제를 선택하거나 또는 특정 주제에 국한된다고 해서 그것을 작품의 스타일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전형적으로 지역다운 스타일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만약 정말로 ‘조명되지 않은’ 훌륭한 지역 미술가들이 많이 존재했다면, 혹은 글로벌 미술과 지역 미술을 보는 서로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면(둘 다 취할 수는 없다), 지역 미술관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위의 글은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었는가?”(1971)1)에서 발췌한 문장에 지역 미술관을 대입해 본 것이다(여성 및 페미니즘을 ‘지역’이나 ‘지역 미술관’으로, 남성 미술을 국제적 미술로, 그리고 기관에 잘 붙지 않는 ‘위대함’은 ‘훌륭함’으로 바꾸었다). 이 기계적 대입의 결과가 꽤 설득력 있게 읽히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노클린의 혜안에 놀랐고(그녀는 실제로 이 질문 방식이 여성 미술이 아닌 곳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미술관의 난제 해결은 어쩌면 여성 미술만큼이나 질긴 편견과의 싸움일 수 있으며, 그동안 제기된 질문이 적절했는지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위의 대입이 정말로 유효한지 하나씩 따져 물으며 “지역 미술관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 한다.
여성 미술가의 자리에 지역 미술관을 놓아본 이유는 대부분의 지역 공립미술관이 여성 미술가들과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류 미술계를 ‘국제적 미술’이 차지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그것을 지역 미술의 대립항으로 놓고 있으며, 그에 대한 입장과 미술관 소장품과 전시에서의 비중을 어떻게 정해야 할 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보고 왔다는 자들이 하도 많아 다들 있다고 확신하는 네스 호의 괴물 같은 것이라 일단은 목격담에 의지해 묘사해 보겠다(이건 어디까지나 목격담이니까 약간의 낯 뜨거움을 감수하자). 서울과 국제 미술 씬에서 활동하는, 그래서 서울의 공립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거나 국내외 ‘유수의’ 비엔날레에도 참여한, 이왕이면 상도 받고 대기업이 주최하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작가를 국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국제적 미술은 주류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미술이며, 그와 대비되는 지역 미술은 자연스럽게 서울이나 해외에서 주목받지 못한 미술이 된다. 이런 위계적 구분법이 어딘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난제를 가볍게 해결해 주는 반가운 존재들은 해당 지역 출신의 국제적 작가들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 미술과 국제 미술을 합친 ‘글로컬’이라는 더 복잡한 괴물이 만들어졌다. ‘글로컬’은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난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양성평등’과 꼭 닮았다.
“인간이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는 인류 역사 전반을 지배해 온 전제였을 뿐 아니라 그간의 언어와 사유 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 역할을 해왔다. 이분법, 짝(pair, 雙)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분법(二分法)은 반반으로 분리된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적, 서구 중심적, 미국 중심적, 서울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논리는 말하는 주체(the definer, subject)와 그에 의해 규정된 대상(the defined, object)의 존재를 전제한다. 주체(one)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他者, the others)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命名)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dichotomy)이다.” 2)
로컬 미술은 곧 비 글로벌 미술이라고 가정하는 ‘글로컬’ 미술관은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 물론 연중 여러 개의 전시를 열 수 있는 미술관에서 지역과 국제 전시를 적절히 배분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명확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며 당연히 모객에도 도움이 된다. 가끔은 국제적 거장의 블록버스터 전시 덕분에 관객 수를 채워야 하는 부담 없이 지역 작가 전시를 할 수 있다는 매우 현실적인 고민 해소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이 지역에서 그 작가인가?”에 대한 비평적 설득 없는 지역/국제의 적당한 전시 배분은 양자의 간극을 부각시키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그런 배분이 지역 미술이 다양해지거나 깊어지는 데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미술관은 쉽게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글로컬’을 내려놓고, 다시 노클린의 방법론을 따라, 지역 미술관이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보자. 우선 대부분의 공립미술관이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가치 있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훌륭한’ 지역 작가를 재평가해서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작업이지만 노클린의 지적처럼 우리는 ‘훌륭함’의 배후에 놓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만약 앞서 말한 글로벌 미술이 되는 조건, 즉 주목 받음이 훌륭함의 기준이라면, 이분법 구도에서 지역 미술은 순환의 늪에 빠진다. 주목받지 못한 지역 작가를 지역 미술관이 주목하면 훌륭한(=주목받는) 작가가 될 수 있는가? 훌륭함의 기준은 서울과 해외에 둔 채로 지역 미술관은 작가의 출신지와 출신 학교만을 체크하면서 ‘지역 출신 국제적 작가’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페미니즘 미술사로부터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가리키는 손가락을 봐야 함을 배울 수 있었다면, 지역 미술관은 다른 손가락, 다른 훌륭함, 다른 가치를 스스로 제안해야만 한다.
그런 다른 가치를 찾는 방법은, 다시 한번 노클린의 주장을 따르자면, 독특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지역 미술의 스타일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역 작가의 작품에 흔히 붙는 “고졸한”, “질박한” 같은 형용사나 “비록 동시대 문법을 따르지는 않지만 ~한” 류의 묘사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 여성 미술을 섬세함이나 여림, 부드러움에 가두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개별 작품들의 성격을 몇 개의 단어로 묶어버리려는 시도 자체가 지역 미술의 한계를 정해둔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성’이란 것이 쉽게 잡힐 수도 없으며 잡힌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지역의 사건에서 유래한 작품이 아니라면 억지로 지역성을 찾아 헤매는 것 역시 또 다른 신화화의 계기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 미술관은 어떻게 질긴 지역/국제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지역성이라는 실체 없는 개념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미술관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지역 미술관은 자신의 손가락 혹은 시스템을 가지고 좋은 작가를 지목할 수 있는가? 노클린은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었던 이유”를 찾으면서 제도의 빈틈, 예를 들면 여성들이 기초 훈련에서 중요한 누드 모델 습작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주목하였다. 지역 미술관의 일차적인 역할 역시 지역마다 다른 제도의 빈틈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미술관이 직접 할 수도 있고, 메울 수 있는 다른 동력을 간접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최근 지역 미술관에서 열린 몇몇 전시에서는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다. 그것이 새롭다는 것은 국제적 미술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역 미술에 대한 미술관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우선, 경기도 미술관의 《시점時點·시점視點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2019) 전시는 최근 미술의 트렌드에 전혀 개의치 않고 경인·경수 지역 미술사의 빈 부분을 채워 넣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실행한 전시였다. 큐레이터는 작가 개인이 아닌 ‘소집단’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고, 방대한 아카이브 자료를 전시하고 출판했으며 심지어 소실된 작품의 복원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최근 주류 미술관의 움직임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차라리 19세기 미술관에서 주력했던 유파 중심의 미술사 연구와 보존 복원 같은 매우 고전적인 미술관의 역할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문득 우리에게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그 선형적 미술사의 빈 자리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두 번째 역시 지역 미술사 관련 전시로, 이제 리모델링을 진행할 부산시립미술관의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2021) 전이다. 이 전시의 독특한 점은 지역 미술사를 주류 미술사에 끼워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지역 연고 작가들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지역적 특성을 묶어내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노클린이 말한 불충분한 문제제기로 보일 수도 있고, 부산의 ‘형상미술’이라는 개념이 미술사적으로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지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해당 시기 연구에서 지역 미술사를 통해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라는 질긴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지역 미술관으로서 의미심장한 도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전시는 경남도립미술관의 《도큐멘타 경남 II – 형평의 저울》(2022)이다. 아무거나 다 받아들이고 뭐든지 빠져나가게 방치하는 성기고 번지르르한 개념들로 꾸린 동시대 미술 전시에 지친 관객들에게, 이 전시는 지역의 특정 사건을 현재와 연결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만으로도 의미심장했다. 여기서도 아카이브 자료의 구성방식은 매우 고전적이었지만, 너나없이 ‘아카이브 열병’의 유행을 뒤쫓던 10여 년 전 주류 미술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심력을 작동시키고 있었다.
지역 미술관이 1차 자료를 수집하여 지역 미술사를 구축하고 지역의 사건들에 주목하려는 시도가 어떤 우려를 나을 지 잘 알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을 찾는 동시대 미술관들의 흐름에서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새롭게 주목받는 작가들을 소개하지 않으면 지역의 관객들에게 공평한 문화향유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아닌가? 좁은 지역 미술계에서 ‘공평’을 앞세운 민원 파시즘에 시달리는 미술관 기획자들의 고충 또한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주목받은 작가를 다시 주목하거나 주목 받을 것이 틀림없는 작가를 약간 먼저 주목하는 일은 미술관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목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작가를 억지로 주목하는 일은 더더욱 미술관의 일이 아니다. 여성 미술가들이 ‘위대함’의 논리가 만든 늪에서 발을 빼려고 했듯이, 지역 미술관도 ‘주목’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술관이 주목하는 곳이 아니라 주목의 근거를 제시하고 만드는 제도일 수는 없는가? 대형 아트페어에 맞춰 연간 계획을 세우는 서울의 미술관들이 너무 쉽게 내려놓은 그 자존심을 지역 미술관에서는 좀 더 지켜도 되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지역 미술관이 지역의 작가와 관객들을 끈질긴 이류성의 늪에서 꺼내주는 방법은 서울과 해외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 1) 린다 노클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1971),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이주은 역, 아트북스, 2021, 21-67쪽 (↑)
- 2) 정희진 엮음,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 2017, 29쪽 (↑)
안소현(독립 큐레이터)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쓴다. 백남준아트센터와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