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그 친구들

부산시립미술관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이미영
아카이브, 미술 아카이브 ‘아카이브’는 그리스어 ‘아케이온(archeion)’, 프랑스어 혹은 라틴어의 ‘아르키붐(archivum)’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들은 ‘통치’, ‘정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르케(arche)’와 연관되며 ‘시작’과 ‘명령’1)의 뜻을 동시에 지닌다.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최초의 것‘이자 ’인위적이고 규제적인 질서‘의 이중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아카이브‘의 사회적 조건은 물리적, 역사적, 존재론적으로 유의미한 가치가 있는 ’기록물‘이면서, 이를 수집, 연구, 보존하여 이용객들에게 제공하는 장소를 포함한다. 미술관에서 주로 다루는 ‘미술 아카이브’2)는 미술 또는 미술 활동과 관련된 각종 사건과 사실, 미술인과 그 주변에 관한 기록물 혹은 장소를 말한다. 미술 아카이브의 일반적인 유형으로는 작가노트를 비롯한, 사진, 영상, 메모, 편지, 브로슈어, 신문, 잡지, 도서 등이 될 수 있으나 아카이빙 주체의 가치 지향점에 따라 그 기본 구성의 방향과 구체적인 유형들이 결정될 수 있다. 아카이브는 과거의 기록을 보관하여 시간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연속성은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아카이브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아카이브 하는가에 따라 엄격한 기록물들의 미래의 시간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자명해 보이며 제도적으로 체계화되는 미술 아카이브는 어떤 미학적 함의를 통해 유의미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아카이브의 근원과 예술과의 연관성에 주목한 자크 데리다의「아카이브 열병」(1996)에서는 근대(산업혁명, 개인존중, 민주주의, 자본주의) 이후 아카이브를 향한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욕망이 가속화되었음을 지적하고 이와 같은 현상을, 기억의 부재를 보상받으려는 징후로 읽어낸다. 그렇다면 아카이브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선언하듯 기억의 부재를 기록으로 보완하려는 욕망은 동시대 미술관 ‘미술 아카이브’의 어떤 방법론(장치)을 통해 유의미해질 수 있을까? 미술 아카이브와 실천 현대미술의 변화는 미술관은 물론, 미술 현장에도 새로운 방식의 공공성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미술사 전반에 걸쳐서 생산되었으나 작품 외의 자료로 비교적 소홀히 관리되었던 미술 아카이브의 가치에 대한 재조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동시대 미술관이 미술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과 대안 서사를 쓰고자 할 때 미술 아카이브는 그 실천을 위한 토대이며 근거이고,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 아카이브를 작품의 부연 설명용으로, 혹은 작가 생애와 관련된 증빙자료로서 활용하는 것이 유행을 넘어 필수적인 전시의 실천 방법이 되고 있지만, 미술 아카이브는 단순한 자료가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이는 아카이브의 양가적인 속성으로써 제도적인 미술 아카이브와 미학적인 미술 아카이브의 충돌이 자료와 작품의 경계를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오쿠이 엔위저가 2008년에 기획한 전시《아카이브 열병 : 현대미술의 도큐먼트 사용》3)이후 아카이브는 현대미술 전시의 형식과 매체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작가들의 아카이빙 방식을 다룬 할 포스터의 「아카이브 충동」, 아카이브의 근원과 예술과의 연관성에 주목한 자크 데리다의 「아카이브열병」, 그리고 지식 체계로 아카이브를 정의하는 미셸 푸코의 이론을 바탕으로 기획된 전시는, 기록물(미술 아카이브)을 선반이나 캐비넷, 서랍에 가득 넣고 쌓아올려 보여주는 기존 방식과 달리 기록물(사진과 영상 매체)을 작가들이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예컨대, 기본적으로 재현에 충실한 사진 작품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가상 인물의 연대기를 만들고, 익명의 사진들을 수집해 허구의 내러티브를 만드는 방식이다. 이러한 아카이브 실천은 기존 거대 서사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대안 서사를 제시하는데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가지며 역사, 기억, 정체성, 상실에 대해 다시 기록하고 사유하는 전시로 평가 받게 했다. 이는 아카이브 개념을 둘러싼 미학적 관심을 전시에 적극 반영하는 동시에 아카이브의 구조와 원리를 차용하거나 이를 새롭게 변경, 해석하면서 아카이브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아카이브 열병」(1996)에서 아카이브란 그저 과거 기록의 집합체가 아니라 동시대 인식론적 투쟁의 장소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카이브란 도리어 사라진 것 혹은 부재의 흔적만을 간직할 뿐이어서 과거의 것이 기억 자체가 될 수 없고, 그 진정한 의미는 지속적으로 현재와 관계 맺는 기록의 도래할 미래의 이야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4) 이처럼 역사를 당대에 재현하는 문제는 기록과 기억이라는 아카이브의 제도적이며 미학적인 양가적 속성을 이해할 때 그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양가적인 속성은 동시대 미술관이 무엇을 어떻게 아카이빙 할 것인가? 에 대한 방법론을 구축하는 근원적 질문으로 작동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 무한할 수밖에 없는 미술 아카이브에 한계와 경계를 설정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여 관리, 보존할 수 있는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다만 아카이빙의 주체, 즉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미술관이 미술 아카이브의 한계와 경계를 잠정적으로 결정하고 선점해야 할 것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은 무엇을 기억할 할 것인가 <88올림픽 기념판화>, 백남준의 <소통/운송>(1995), 박은진의 <98가상스크린(키스)>(1999), 임응구<장미>(1930), 성백주<무제>(1964), 이우환<바람과 함께>(1992), 크리스티앙 볼탕스키<The Coat>(2000) 등의 소장 작품들, 그리고 그 사이에 진열된 자료들, 텍스트로 가시화되는 연구물들, 미술관의 비전을 제안하는 커미션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는 또 하나의 전시《과거는 자신이 줄거리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에서 미술 아카이브는 부산시립미술관의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서사를, 줄거리를 미학적으로 가시화한다. 부산시립미술관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과거는 자신이 줄거리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부산시립미술관의 건물 노후화에 따른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앞두고 1998년 3월 개관 이후 현재까지 25년 동안의 미술관의 활동을 살펴보게 한다. 전시에 따르면 1998년, 부산 시민의 문화적 향유권에 대한 요구와 ‘국제화’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할 무렵 부산은 ‘부산국제영화제’가 3회째 이어지며 영상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었다. 당시 부산시립미술관은 이 같은 사회 문화적 흐름 속에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백남준의 뉴미디어 작품 3점을 수집하고, 영화와 미술의 관계성을 다루거나 비디오의 역사를 다루는 전시를 선보이며 시대에 발맞추어 미술관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한편 이러한 국제적 조류 속에서도 부산미술 1세대 작가 연구를 비롯해 지역미술사를 정립하기 위한 수집과 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으며, 2008년 미술정보센터를 개관하면서 소장품뿐만 아니라 미술 아카이브에 대한 인식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산 미술사 정립을 위한 주목할 만한 전시가 다수 열렸으며, 이들 전시는 192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 미술사를 한국 미술사라는 더 큰 문맥 속에 위치시키며 이 둘의 상호연결성을 통해 연구 범위를 넓혀 왔다. 2003년 광안대교 개통은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르며 화려하게 변모하는 도시의 변화를 연결하는 가운데 미술관은 첨단정보도시를 위시한 관광특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도시의 변화는 미술의 변화로 이어지며 변화하는 도시와 삶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전시 개최와 소장품 수집으로 연결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2015년 문화도시로서의 도시브랜드를 강화하기 위한 거점이자 명소로서 ‘이우환 공간’을 미술관 내 별관으로 개관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유명 작가의 전시를 유치하였으며 자본주의 시장논리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해외 미술 작품 수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최근에는 소장품자료연구팀이 신설되었고, ‘BMA 소장품 선집’을 발간하며 미술관 수집과 연구의 방향성을 더욱 체계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처럼 부산시립미술관이 25년 동안 도시 성장과, 사회 문화적 흐름 속에서 미술의 변화와 미술관의 현재를 점검하며 소장품의 수집 방향성을 거듭 재조정해 온 것은 미술 아카이브에 대한 수집 방향성을 동시에 조정해야 한다는 것과 다름없는데, 《과거는 자신이 줄거리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과 같은 장르의 해체, 즉 오브제, 영상, 퍼포먼스, 설치, 개념 등 그 유형이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부산시립미술관을 비롯한 동시대 미술관은 미술 아카이브가 작가의 작업 스타일과 철학,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에 따라 어떻게 조정될 수 있는지, 이에 따른 아카이빙의 다양한 접근방식은 무엇인지 제안하고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미술 아카이브부터 이벤트나 퍼포먼스와 같은 가변적인 미술 아카이브, 사라지거나 소멸해버리는 탈물질화 과정이 강조되는 미술 아카이브, 작가가 작품 활동을 위해 검토한 다양한 자료의 미술 아카이브 등 변화하는 미술 아카이브의 새로운 유형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미술 아카이브가 작가노트를 비롯한, 사진, 영상, 메모, 편지, 브로슈어, 신문, 잡지, 도서 등으로 시각화되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넘어서야 한다. 2000년대 이후 국내 미술관이 적극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미술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의 쟁점은 ’무엇이 미술 아카이브가 되며, 미술 아카이브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다. 비교적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이 논의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최초의 것이자 규제적인 질서가 있는 미술 아카이브는 어떤 유형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시간들을 수집해야 한다. 이를 통해 드러난 것으로 드러나지 못한 것을 상상하고 기억할 때 유행처럼 실천되고 있는 아카이브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자신이 줄거리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부산시립미술관의 다양한 활동을 수집과 연구, 전시의 프레임 속에서 어떤 체계와 질서를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선명한 것은 제도적으로 체계화된 미술 아카이브이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시실 밖에서, 아카이브 외부에서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는 시간을 분기하는 비정형화된 기억이다. 다시 말해 전시는 미술 아카이브를 통해 부산시립미술관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살피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할지 끊임없이 질문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우리가 읽고 보는 것은 기념비적인 작품과 역사화된 문구들 그 자체가 아니라, 명백하게 가시화된 것에 의해 사라진 비가시적인 어떤 기억일 것이다. 우리가 부산시립미술관 미술 아카이브를 통해 기억해야하는 것은 국제화의 분위기 속에서 이름 없이 소멸한 것들, 영화 도시 부산에서 길어 올리지 못한 이미지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백남준과 도시 부산의 연결들, 부산미술사 정립을 위해 사라진 작가와 작품들, 첨단도시 관광특구에서 이미지 없이 가라 앉아 있는 소리들일지 모른다.

이미영(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코디네이터를 시작으로 창원아시아미술제 큐레이터,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로 활동했다. 주요기획으로 2016 창원아시아미술제《청춘본심》(2016), 부산시립어린이미술관《기억극장》(2018), 경남도립미술관 3·15의거 60주년 기념《새로운 시의 시대》(2020), 동시대주제기획《황혜홀혜》(2021) 등이 있다. 최근에 작가의 작업 스타일과 철학,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에 따라 달라지는 ‘미술 아카이브’에 관한 논의를 전시의 형태로 실천한 《아카이브 리듬》(2023)을 기획했다. 현재는 하나의 아카이브 실천으로써 시, 연극, 회화, 사진, 영화의 서사 구조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