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빵과 장미’, 또는 인간의 존엄을 기억하기
박소현
1.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도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 ‘포용적 박물관/미술관(inclusive museum)’과 같은 비전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처럼 확산되었다. 그 표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모종의 ‘정의’ 감각을 일깨우는 이러한 흐름은 기존의 미술관 존재방식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하나, 그 성찰의 내용이 반드시 동질적이라 보기는 모호한 상태에 처해 있다.
현재까지도 유효한 근대적 박물관/미술관의 핵심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구체제의 부유한 권력집단의 사적 컬렉션을 민족과 국가의 공적 자산으로 재전유하고, 형식적으로는 이를 일반공개함으로써 다수의 사람들이 공공의 문화유산을 경험적으로 공유하는 방식을 정립했다. 이러한 혁명적 전환에 따라 박물관/미술관은 문화적 차원에서 근대적 민주주의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문화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근대를 연 정치적 혁명과 함께 각인된 이러한 성격은 현재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는 다양한 목소리와 실천이 박물관/미술관을 소환해내고, 그 존재방식의 완전한 평등과 민주화를 촉구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1) 우리가 ‘모두’ 또는 ‘누구나’라는 말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적 관계와 삶의 조건을 떠올리는 만큼이나, 우리는 그 말들을 통해 이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현실을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기실 ‘모두’로 형용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극명한 격차, 다종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배제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공통된 현실 인식이 작동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이란 차별적인 현실과 평등의 이상 사이에 엄존하는 간극을 직시하고 그 실천적 변화를 지향하는 슬로건이 된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의미규정은 보다 복잡한 맥락들 속에서 변용된 측면도 강하다. 권력집단의 사적 컬렉션을 ‘일반공개’ 형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공유하는 일이 권력 엘리트의 전유물을 통한 ‘계몽’ 또는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로 간주되었던 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직면했다. 1960년대 이후 ‘왜 노동자 계급은 미술관에 가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서구의 박물관/미술관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 그 대표적 징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른 진단과 해법은 여러 갈래로 출현했다. 노동자의 생활시간을 고려해 개관시간을 확대하거나, 경제적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무료관람을 권장하거나, 운영 전반에서 노동자 시민들의 참여 및 네트워크를 강화하거나 하였으며, ‘공통의 문화(유산)’에 대한 비판적인 재규정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동은 박물관/미술관에 국한되지 않는 다층적인 억압과 지배, 차별과 배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민운동의 고조, 그로 인한 사회문화적 성찰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박물관/미술관은 점차 소비자본주의의 확대와 자본주의적 도시개발, 그에 따른 일상의 재구조화, 관광산업의 발전 등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다. 가령, 1969년에 착공한 퐁피두센터는 빈민과 이주노동자의 거주지로 슬럼화된 파리 원도심에 대한 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파리의 풍경을 더욱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펙터클로 재정비하는 도시개발은 부동산 가격의 급등을 수반하며,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원주민들을 도심 외곽으로 밀어냈다.2) 미술관과 자본주의적 도시개발이 긴밀하게 연루될수록, 노동자 계급의 빈곤과 위태로운 생활조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주변화하는 대신, 소비자와 관광객의 경제원리가 이를 대체했다. 이러한 사태는 미술관의 근대적 공공성과 미술관 노동자의 업무‧생활 여건을 위협하는 데에까지 미쳤다. 2008년 경제위기 직후 집권한 사르코지 대통령은 운영예산 삭감과 퇴직 인원의 50%만 충원하는 방식의 대규모 감원을 골자로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추진했고, 퐁피두센터 노동조합은 파업으로 저항했다.3) 이른바 ‘작은 정부’를 표방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공공예산의 삭감, 시장원리 및 기업경영원리의 도입, 사영화(privatization) 등을 패키지로 추진했는데, 이는 곧 특정 계층의 사적 컬렉션을 공공의 자산으로 전환함으로써 출현한 근대적 박물관/미술관의 공공성에 근본으로부터 역행하는 조치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이는 대규모의 인력감축을 수반함으로써 다양한 직분의 미술관 노동자들이 실업과 고용 불안정에 직면하는 전례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2023년 10월에도, 퐁피두센터의 대대적인 개조‧확장 공사로 인한 장기간 폐관(2025~2030년 예정) 동안에 미술관 노동자들의 실업 및 고용 불안정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파업이 진행되었다.4)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퐁피두센터의 자구책은 근대적 공공성의 회복과 미술관 노동자의 고용 안정화보다는 미술관 자체의 브랜드화(또는 기호화)를 통한 상품가치의 극대화였다. 프랑스의 국립문화기관이 프랑스 정부의 공적 예산 삭감을 글로벌한 분관 마케팅을 통해 벌충함으로써 공적 문화자산의 급진적인 시장화‧사유화 실험을 선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부산을 비롯해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퐁피두센터 분관 유치경쟁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대기업(한화)과 63빌딩 내에 퐁피두센터 분관을 설치한다는 최종 계약이 성사된 점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5) 백화점이나 대규모 쇼핑몰과 미술관의 경계가 무너지는 데 대한 비판적 논의들이 무색하게도, 미술관의 평등과 민주화가 ‘소비자 주권’으로 수렴되는 현상은 가속화되었고, 박물관/미술관의 공공성 개념은 그 실체조차 희미해진 ‘상상의 동물’로 화하는 중이다. 사영화, 즉 ‘탈-공유화(de-commoning)의 비극’을 주장한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에 따르면, ‘공적 부채를 줄이기 위해 공적 지출을 삭감해 예산균형을 맞춘다’는 신자유주의 정부의 구조조정 논리는 공적 부채가 발생한 원인, 즉 대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세금감면 조치로 인한 세수부족을 은폐하고, 이를 공적 자산의 처분(사유화)으로 상쇄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 및 취약한 삶의 조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왜 노동자 계급은 미술관에 가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탈-공유화의 비극’에 대한 때늦은 탄식과 같이 공허해진다.
2.
가이 스탠딩에게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사영화의 멀지 않은, 동시에 분명한 결말은 ‘빈곤의 디스토피아’다.
거기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프레카리아트로 내몰리고, 과거에 공유지였던 곳에 들어갈 돈을 지불할 수 없으며, 법률 서비스에 대해 돈을 낼 수 없고, 문화적 통로에 접근할 수 없고, 계몽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으며, 데이터에 기초한 알고리즘과 다국적 디지털 플랫폼의 통제와 조작에 종속될 것이며, 부호들이 ‘지식재산권’ 및 기타 자산을 사유화하는 것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지대소득을 축적하고 로비스트, 정치가, 정당들이 그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자기 재산을 사용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것이다.7)
그는 공유지(commons)를 공적 부(public wealth)와 호환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박물관/미술관을 공공건축, 공공도서관, 공공극장, 대중매체, 공공예술 등과 더불어 ‘문화 공유지’의 구성요소로 간주했다. 이 ‘문화 공유지’가 신자유주의적 예산삭감의 대상이 될 때, ‘모두’라는 울타리에서 첫 번째로 배제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난한 사람이다.
긴축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박물관과 미술관뿐만 아니라 지역 극장에 대한 예산 삭감은 필연적으로 문화 공유지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게 된다. 상업화로 인해 박물관에 입장료가 생기거나 극장 티켓 가격이 더 높아질 경우 저소득층은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다.8)
고삐 풀린 사영화는 이러한 배제를 전방위적으로 확장시켜 불평등을 심화한다. 근대적인 공공미술관은 이 사영화의 대표적인 전리품이 되어가고 있다. 전근대적인 사적 컬렉션의 복귀인 양 슈퍼리치들의 미술 컬렉션이 유행처럼 번지는 와중에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공공미술관이라는 공유지의 ‘탈-공유화’를 추동하면서도 이 공공미술관의 형식을 끊임없이 욕망하고 복제한다는 것이다.
예술을 개인과 기업의 자선활동에 의존하게 하거나 그들이 예술작품을 상업화해 수입을 올리도록 하는 것은 다양성을 훼손하고, 공유자, 특히 저소득층이 접근하는 것을 억누르며, 실험을 가로막는다. … 금권정치가 세계적으로 부상하면서 엄청난 부자들은 사적인 예술품 수집에 뛰어들었고, 세금 관리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예술품 소유를 확대했다. 이들은 개인 박물관과 미술관을 세우고 주요 예술작품을 사들여 공공미술관이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9)
가이 스탠딩은 이처럼 “문화 공유지의 공적 공간이 침식될 경우 공감을 배우고 강화하는 일도 침식”된다고 지적한다. 이때 ‘공감’은 “좋은 사회의 핵심적 감정”으로서 “타자의 곤경이나 행동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을 ‘타자’의 처지에 상상적으로 놓아보는 능력”이다. 그는 문화 공유지로서의 공공극장이 이러한 공감을 발전시켜 “인간의 본질적 조건인 공동성(common-ness)을 강화”하는 장소라 설명했으나, 이는 비단 공공극장뿐 아니라 모든 문화 공유지에 해당하는 속성이다. 그는 문화 공유지가 “우리의 공유감, 우리의 공감, 우리의 인류애를 배우고 개선하는 장소이자 방법”이라 역설하며, 이를 축소하는 것이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라 경고했다.10)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회는 그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이 선별적이라면 그 역시 절망적이다. 가이 스탠딩이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빈곤의 디스토피아’라 지칭한 미래상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빈곤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사회, 공유지로부터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 또는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낙인, 혐오, 적대다.
이러한 ‘빈곤의 디스토피아’와 미술관이 무슨 상관인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이라는 작금의 슬로건을 상기해 볼 때, 미술관은 ‘빈곤의 디스토피아’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희생물이자 유용한 수단이자 매력적인 전리품이라 할 수 있다. 그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에서 빈곤과 가난한 사람들은 영원히 미술관 문밖에 배치된다.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문화역 서울 284’와 홈리스들의 오랜 공존에도 불구하고, 마치 홈리스들에게만 반응하는 결계라도 있는 양 이 문화 공유지가 애써 그들을 의식하지 않으며 전시를 하고 관람객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공감 없는 공존, 좀 더 정확히는 빈곤에 대한 문전박대라 할 이러한 배치 방식은 가난이 매우 복잡한 문제이고 “우리 모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인 현상”11)이라는 인식을 은폐한다.
3.
1910년대 초,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에서 등장한 “모두를 위한 빵, 그리고 장미(Bread for All, and Roses Too)”라는 슬로건은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이 누락하고 있는 ‘빵과 장미의 관계’를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현재적이다. 당시 여성참정권 운동가 헬렌 토드(Helen Todd)는 여성의 투표가 “집과 안식처와 안전이라는 인생의 빵과, 음악과 교육과 자연과 책이라는 인생의 장미를 이 나라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누리게 될 때가 오도록 도울 것”이며, “‘모두를 위한 빵과 장미’가 있게 되는 날에는 감옥도, 교수대도,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빵을 벌기 위해 거리로 내몰리는 소녀들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12) 1912년에 노동운동가 로즈 슈나이더먼(Rose Schneiderman)도 이렇게 연설했다.
노동하는 여성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에 대한 권리이다. 부유한 여성이 삶과 태양과 음악과 예술에 대한 권리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권리 말이다. 당신이 가진 것이라면 가장 가난한 노동자라 해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빵이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하다.13)
이 두 여성 운동가들에게 빵과 장미 중 어느 한쪽이 없는 인생이란 인간으로서의 삶이라 볼 수 없다. 빵이 ‘단순한 생존’이라면 이들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 ‘모두를 위한 빵과 장미’란 남성과 여성, 부유한 여성과 가난한 여성 노동자 사이에 차별 없는 ‘삶에 대한 권리’,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빵은 육신의 양식이지만, 장미는 좀 더 섬세한 무엇의-단순히 마음만이 아니라, 상상력과 정신과 감각과 정체성 같은 것들의-양식이다. “빵과 장미”…에는 생존과 신체적 복지 이상의 것이 필요하고 또 권리로서 요구된다는 맹렬한 주장이 들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 존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계량 가능한 것,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재화 및 여건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강력한 반발도 담고 있다. 이런 선언들에서 장미란, 인간이라는 존재가 복잡하고 욕망들은 환원 불가능하며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종종 훨씬 더 섬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14)
솔닛은 1910년대의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의 사상에 공감하면서도 ‘빵과 장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하나 덧붙였다. 그것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계량할 수 있다거나 눈에 보이는 재화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인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솔닛은 20세기 초에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인간의 고귀한 존엄을 상징했던 ‘장미’가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취약하고도 위험한 노동조건, 생산성과 효율성을 명목으로 한 비인간적 기계부품화와 초과근무, 성적 괴롭힘과 쉬운 해고, 회사의 반노조정책, 환경파괴 등을 조건으로 대량생산되는 현장을 목도했다. 이는 모든 것을 계량화라는 것을 합리성과 효율성이라 규정하는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삶에 대한 권리 또는 존엄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솔닛은 이렇게 질문한다.
장미의 추악함은 그런 식으로 생산된다는 데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 점을 간과한다는 데 있을까? 장미는 어떤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것이라는, 일종의 거짓말이 되었는가? 그것들은 이제 기만의 징표, 실제 생산 여건보다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표의하는 일종의 기만이 아닌가?15)
장미의 아름다움 이면의 추악함을 통해 솔닛은 인간의 삶에 대한 권리마저도 자양분 삼아 증식하는 신자유주의의 작동방식 자체를 직시하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장미가 추악하다면,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여전히 빵에 대한 장미의 특별함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면서, 빵과 장미를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그러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있을 듯하다. 위 질문에서 장미를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으로 바꿔 읽었을 때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위험한 징후, 내지는 우리가 ‘빈곤의 디스토피아’에 매우 가까이 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일지 모른다. 그 임계점에서 ‘모두를 위한 박물관/미술관’이 사회적 불평등과 타인의 빈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비극적 사태를 위장하는 기만적 징표가 아니라, 공감을 위한 문화 공유지가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모두를 위한 빵과 장미’의 절박함, 거기에 담긴 인간의 존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1) 박소현, 「평등한 박물관은 어떻게 가능한가: 접근권의 평등과 ‘비-관람객’/‘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박물관학보』 40 (2021.6), pp. 1-30. (↑)
- 2) 박소현, 「기후변화와 미술관, 그 부정한 관계의 연대기」,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 부산현대미술관, 2022, p. 20. (↑)
- 3) 「佛 퐁피두센터 1주일째 파업…다른 문화명소로 확산」, 『동아일보』, 2009년 12월 1일.; 「佛 퐁피두센터 일주일째 문 닫았다」, 『MBC뉴스』, 2009년 11월 30일. (↑)
- 4) 「‘프랑스 대표 문화공간’ 퐁피두센터 3년간 폐쇄」, 『조선일보』, 2021년 1월 28일.; 「파리 퐁피두센터 리모델링 위한 폐쇄 앞두고 직원들 파업」, 『컬처램프』, 2023년 10월 18일. (↑)
- 5) 「부산 간다는 퐁피두센터 놓고 인천시 ‘뒷북 유치전’」, 『경향신문』, 2022년 11월 15일.; 「퐁피두 한국 분관 서울 63빌딩에 생긴다…한화 그룹 “협의중”」, 『연합뉴스』, 2023년 3월 15일.; 「한화, 63빌딩에 퐁피두미술관…2025년 10월 개관」, 『대한경제』, 2023년 7월 28일. (↑)
- 6) 가이 스탠딩, 『공유지의 약탈』, 안효상 옮김, 창비, 2021, pp. 80-82. (↑)
- 7) 가이 스탠딩, 『공유지의 약탈』, p. 421. (↑)
- 8) 가이 스탠딩, 『공유지의 약탈』, p. 307. (↑)
- 9) 가이 스탠딩, 『공유지의 약탈』, p. 316. (↑)
- 10) 가이 스탠딩, 『공유지의 약탈』, pp. 306-316. (↑)
- 11) 대런 맥가비, 『가난 사파리-하층계급은 왜 분노하지 않는가』, 김영선 옮김, 돌베개, 2020, p. 188. (↑)
- 12) 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최애리 옮김, 반비, 2022, p. 120. (↑)
- 13) Rose Schneiderman, “Votes for Women,” Life and Labor, September 1912, p. 288.; 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pp. 123-124. (↑)
- 14) 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pp. 121-122. (↑)
- 15) 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p. 293. (↑)
박소현(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박소현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전공 교수로, 예술제도와 예술실천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화정치에 관심을 갖고 미술사학과 박물관/미술관학, 문화예술정책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